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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n논단] 경종을 울려다오

김충제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18.03.28 17:16

수정 2018.03.28 17:16

[fn논단] 경종을 울려다오

옛날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 나 역시 애연가였다. 하루에 한 갑으론 모자라 두 갑을 피울 때도 있었다. 드라마 로케이션을 나가면 세 갑도 거뜬히 피웠다.

카메라 뒤에서 "레디 고"를 외친 후 배우의 연기가 마음에 안 들면 단말마 같은 "NG"를 내뱉고 담배에 불을 붙였다. 하루에 수십 번 NG, 담배, NG, 담배. 돌이켜보면 배우가 연기를 잘못해서가 아니라 담배를 피우려 NG를 외쳤는지도 모르겠다. 그 시절은 사무실에서도 담배를 피웠다.
어떤 골초감독은 파이프담배로 온 사무실을 특이한 냄새로 진동하게 만들기도 했다.

하긴 버스와 택시 안에서도 눈 하나 껌벅 않고 야만을 행했던 시절. 지금 생각하면 경종을 울릴 풍경이다.

사라진 풍경 중에는 아쉬운 장면도 있다. '1980년대 초 방송사 신입 시절, 로비엔 매달 21일이 되면 우아한 한복 차림의 중년여성 서너 명이 나타났다.

똑같은 화장에 똑같은 유리구슬백을 든 그들은 1층 로비 한쪽에 다소곳이 앉아 엘리베이터를 날카롭게 노려보았다.

그 시각 사무실에선 선배들이 타이피스트 여직원 옆에 줄을 죽 선다. 처음엔 무슨 영문인지 전혀 몰랐다. 그때는 월급을 현금으로 봉투에 넣어주던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 선배들은 월급봉투를 위조했다. 봉투 겉에 적힌 본봉 200을 180으로, 시간외수당 28만원을 18만원으로 고쳐 한 달 외상 술값을 갚았다.

지금은 사장님께서 은행 계좌로 안방마님들께 휙~ 송금하는 바람에 모든 게 낭패가 되었지만, 그 시절 선배들은 삥땅을 하고도 월급날 하루만은 '가장과 아버지'로서 액면가대로 대접을 받았다. "여보, 한 달간 수고 많았습니다!"

그래서 나는 주장한다. "월급봉투를 부활하자! 붕괴된 가장과 아빠의 권위를 재건하자!"

전국에서 아내들의 경치는 소리가 들려온다. 발언 취소.

사라진 풍경 중에 꼭 복원하고 싶은 것도 있다. 옛날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엔 신성한 소리가 있었다. 일요일 한낮과 저녁 무렵 들려오던 종소리.

동네 성당과 교회 높은 종탑에서 은은하게 울려퍼지던 그 소리는 삶에 지친 우리의 영혼을 위로해주고 생활 중에 저지른 작은 죄들을 씻어주었다.

상처를 어루만지는 창조주의 치유의 손길이었고, 앞날을 타이르는 인자한 쓰다듬이었다. 월급봉투 위조로 아내를 속인 선배도, 핑계로 배우에게 NG를 외친 PD도 그 소리를 들으며 반성하고 위로받았을 것이다.

현재 우리네 삶은 훨씬 더 팍팍해졌다. 주위를 둘러보면 아우성으로 가득 찼다. TV와 라디오, 컴퓨터와 휴대폰, 온갖 매체들이 매일 형형색색의 아우성을 뿜어낸다.

궤변과 억설. 변명과 독설. 폭로와 고발로 날이 새고 날이 진다.
사람들은 청진기로 환자를 진단하는 의사처럼 휴대폰에 이어폰을 끼우고 이 세상을 진단하려 나선다. 하지만 얼굴 표정은 더 어두워지고 걱정으로 가득할 뿐이다.


거칠고 혼란스러운 세상, 우리네 영혼을 위로하고 삶을 타일러줄 신성한 소리가 필요하다.

제발 그 위로와 경고의 종소리를 울려다오!

이응진 한국드라마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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