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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n 해외 대기획 3탄] "페소로 저축하면 손해"..국민들 ‘달러 신봉자’로 만든 인플레

이태희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18.04.09 17:06

수정 2018.04.09 17:06

[포퓰리즘의 비극 중남미를 가다] 아르헨티나 - <3>자국화폐 불신하는 국민들
페소 쓰면 가격표 매일 바꿔 車 할부땐 이자율도 치솟아
달러 수집열풍에 외화 바닥 前정권 결국 달러거래 제한
암거래 ‘캄비오 환전상’ 판쳐
부에노스아이레스 플로리다 거리에 '캄비오(cambio·교환합니다)'라고 적힌 환전소 간판이 반짝이고 있다. 사진=남건우 기자
부에노스아이레스 플로리다 거리에 '캄비오(cambio·교환합니다)'라고 적힌 환전소 간판이 반짝이고 있다. 사진=남건우 기자


【 부에노스아이레스(아르헨티나)=이태희 남건우 기자】 "7만5000달러입니다." 부에노스아이레스 시내 부동산에 들어가 전세 가격을 문의하자 중개인이 '달러'로 답을 했다. 왜 자국 화폐인 '페소'를 쓰지 않느냐고 물었다. 중개인은 "페소를 쓰면 인플레이션 때문에 가격이 계속 달라진다.
매일 시세표를 바꿀 수는 없지 않으냐"며 피식 웃었다. 온 나라가 달러를 쓰고 있다. 아르헨티나 국민들은 물건 값을 달러로 계산하는 것에 익숙하다. 지독한 인플레이션을 몸으로 겪으며 생긴 습관이다. 특히 집이나 자동차 등 값이 나가는 상품을 거래할 때 달러 선호현상은 두드러진다.

부에노스아이레스시 5월광장에 위치한 재무부 건물 옆으로 시민들이 지나가고 있다. 건물 외벽에는 독재정권 당시 시민들에게 발포했던 총알 자국이 선명히 남아 있다. 사진=이태희 기자
부에노스아이레스시 5월광장에 위치한 재무부 건물 옆으로 시민들이 지나가고 있다. 건물 외벽에는 독재정권 당시 시민들에게 발포했던 총알 자국이 선명히 남아 있다. 사진=이태희 기자


■귀한 달러 맹신

페소로 제품을 판매하는 매장은 일시불과 할부가격이 상당한 차이를 보였다. 한 자동차 매장은 30만페소(약 1600만원)인 중형차 한 대를 48개월 할부로 구매하겠다 했더니 37만페소(약 1950만원)까지 가격을 올렸다.

할부 기간이 늘어날수록 불어나는 이자율 폭도 크다. 12개월일 때 4.9%이던 자동차 할부 이자율은 48개월이 되자 23.9%까지 치솟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발생할 엄청난 인플레이션을 미리 감안한 수치다. 할부금액을 지불하는 중에 이자율이 바뀌기도 한다. 한 달에 내기로 계약한 금액이 인플레이션 때문에 어느 순간 오를지도 모른다는 설명이다. 딜러는 "할부는 어렵고 복잡하다"며 일시불 구매를 추천했다.

페소를 사용하는 환경이 불안정하다보니 아르헨티나 국민들은 달러를 무한 신뢰하기 시작했다. 다시 말해 자국 화폐인 페소에 대해선 불신으로 가득 차 있다.

매장 앞에서 만난 택시기사 카를로스씨(67)도 열렬한 달러 신봉자였다. 그는 "여유가 생기면 무조건 달러를 사서 적금을 든다. 페소로 저축하는 건 손해"라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돈을 벌려고 그러는 게 아니라 돈 가치를 유지시키기 위해 달러를 사야 한다"고 설명했다.

국민들이 달러를 광적으로 수집하다보니 외환보유고는 점차 줄어들었다. 2007년 말 집권한 크리스티나 전 대통령은 이를 막기 위해 개인의 달러 거래를 제한했다. 달러 거래를 할 땐 반드시 정부에 보고해야 했고, 일정 금액 이상의 달러는 살 수 없도록 했다.

부작용이 뒤따랐다. 특히 암거래 시장이 활성화됐다. 달러 거래가 제한되자 암거래 환전상들이 쏟아져 나왔다. 이들은 거리 곳곳에서 저마다 독특한 리듬을 넣어 "캄비오, 캄비오!(cambio.교환합니다)"를 외치며 호객행위를 한다. 번화가에선 열 걸음에 한 번씩 마주칠 수 있을 정도로 그 수가 많다.

마우리시오 마크리 대통령은 집권 이후 외환규제 조치를 해제했다. 이후 캄비오 환전상도 많이 줄었지만 아르헨티나 국민들의 달러를 향한 애정은 식지 않았다.

부에노스아이레스 시내 중심지 산니콜라스 지구에 위치한 부동산 중개업소 앞에서 집을 구하려는 시민들이 시세표를 확인하고 있다. 사진=남건우 기자
부에노스아이레스 시내 중심지 산니콜라스 지구에 위치한 부동산 중개업소 앞에서 집을 구하려는 시민들이 시세표를 확인하고 있다. 사진=남건우 기자


■뿌리깊은 정치 불신

아르헨티나 국민은 자국 화폐 이상으로 자국 정치인들을 믿지 못한다. 부에노스아이레스 시내 중심에 위치한 대통령 집무실 앞에는 높은 차단벽이 세워져 있다. 정치권과 국민의 거리감을 여실히 느끼게 해주는 장면이다. 아르헨티나 민주주의 상징으로 여겨지는 '5월 광장'에서 시위가 자주 열리자 정부는 아예 벽을 세워 진입을 차단해버렸다.

국민들은 만성적 국가 경제위기도 무능한 정치권 때문이라고 굳게 믿고 있다. 특히 지난 1989년 당선된 카를로스 메넴 전 대통령의 어설픈 신자유주의 정책은 경제 대혼란을 야기했다. 메넴 전 대통령은 인플레이션을 잡기 위해 달러와 페소 환율을 1대 1로 고정시켰다. 인플레이션은 다소 줄어들었지만, 경쟁력을 잃은 기업과 공장들이 줄줄이 도산했다. 50%를 넘는 이자율의 고리대금업도 성행했다.

1976년부터 1983년 사이 집권한 군부독재 정권은 국민들에겐 잊을 수 없는 악몽이다. 이른바 '더러운 전쟁'으로 불리는 극심한 인권탄압이 자행됐다. 정부에 비판적인 사람들은 모조리 잡아 고문.살해했다. 이 기간 실종되거나 살해된 국민은 최대 3만여명에 달한다.
5월광장 옆에 위치한 재무부 건물 외벽엔 총알 자국들이 선명히 남아 있다. 군부독재 당시 전투기를 이용해 시민에게 기관총을 발포했던 흔적이다.


5월광장에서 만난 노점상인 페드로씨(62)는 "얼마 전 군부독재자 중 마지막 생존자였던 레이날도 비그노네 전 대통령이 감옥에서 생을 마감했다"며 "비그노네를 끝으로 다시는 권력을 악용하는 정치인이 나오지 않길 바란다"고 말했다.

golee@fnnews.com 이태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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