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중로]

갑사에서 동학사로

지령 5000호 이벤트

어슴푸레한 새벽녘에 눈을 떴다. 몇 번 미뤘던 산행을 오늘은 떠날 참이다. 게을러진 탓인지 서울 근교를 벗어난 산행이 요즘은 쉽지 않다. 주말, 한숨 더 자고 싶은 유혹으로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고 길을 나섰다. 남들이 보면, 뭐 대단한 산행인가보다 했겠지만 꼭 그런 것만은 아니다. 대전이나 공주 부근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마치 서울의 북한산이나 청계산처럼 일상인 산일 수도 있겠다. 계룡산. 아니 계룡산에 오른다기보다는 갑사에서 동학사로 넘어가는 길을 가보기로 했다. 넘는 길에 계룡산이 있으니 그곳에 가기로 한 것이다. 언젠가는 걸어보고 싶었던 길. 이상보의 수필 '갑사로 가는 길'에서 적은 바로 그 길이다. 이상보는 겨울에 동학사에서 갑사로, 나는 봄에 갑사에서 동학사로 넘기로 했다. 별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다. 이상보는 겨울에 동학사에서 갑사로 걸었고, 난 그 길을 봄에 이상보와는 반대편에서 올라 걸었을 뿐이다.

갑사와 동학사를 알게 된 것은 순전히 이상보 때문이었다. 옛 교과서에 실린 수필 '갑사로 가는 길'은 눈이 내리던 어느 날 이상보가 동학사에서 등산을 시작해 갑사까지 가는 풍경을 담았다. 동학사와 갑사의 중간쯤, 삼불봉 아래 자리잡은 남매탑에 얽힌 전설이 이 수필의 백미다.

신라 선덕여왕 원년에 한 승려가 이곳에 움막을 치고 수도를 하고 있었다. 어느 날 밤, 움막에 호랑이가 나타나고, 승려는 죽음을 무릅쓰고 이 호랑이의 목안에 걸린 비녀를 뽑아준다. 여러 날이 지난 후 호랑이는 이에 보답하려는 듯 처녀를 물어다 놓고 간다. 승려는 정성을 다해 기절한 처녀를 돌본다. 알고 보니 그 처녀는 경상도 상주에 사는 김화공의 딸이었다. 그때가 한겨울이라 승려는 눈이 녹을 때까지 처녀를 돌본 후 봄에 집으로 돌려보낸다. 하지만 승려의 신앙심과 도덕심에 반한 처녀는 부부의 예를 맺기를 청한다. 그러나 승려는 수행정진을 위해 청을 고사하고 대신 의남매가 되기로 한다. 둘은 계룡산에서 평생토록 남매의 정으로 지내며 수도에 힘썼다. 뒷사람들이 이들을 칭송하며 세운 탑이 남매탑이다.

이상보는 이 전설을 인용해 호랑이의 아가리에 손을 집어넣고서도 담대할 수 있는, 처녀의 청혼(유혹?)에도 흔들리지 않는 수도자의 평정심을 얘기하고 싶었을 것이다.


촛불 혁명과 함께 시작된 문재인정부 들어 가슴이 뻥 뚫리는 듯한 시원함이 있지만 한편으론 황제외유 시비, 드루킹 댓글 사건, 채용비리 파장, 적폐 청산 등으로 편한 날이 별로 없다. 세상사가 무척 복잡해지면서 머리 아프고 가슴 답답케 하는 일들의 연속이다. 이 봄, 갑사에서 동화사까지 짧지 않은 길을 걸으며 흔들리지 않는 평정심을 한때나마 느껴보면 어떨까. 그 길에서 이상보는 눈꽃을 봤고 나는 흐드러지게 핀 홍매화와 진달래를 봤다.

yongmin@fnnews.com 김용민 금융부장·부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