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장칼럼]

악당의 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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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블이 매년 내놓는 영화 속 악당들은 매력적이다. 생김새, 인종, 태어난 행성도 제각각 다르지만 마블의 악당들은 항상 주관이 뚜렷하고, 확고한 철학을 가진 존재들로 묘사된다. 물론 자신들의 이상을 실현하는 방법론이 폭력이라는 점에서 악당으로 불리기에 손색이 없기는 하다.

최근 개봉한 '어벤져스:인피니티 워'는 그간 마블이 한 장 한 장 쌓아올린 돌탑의 정점에 있는것 같은 작품이다. 여기에 타노스라는 악당이 등장하는데 이 친구가 상당히 매력적이다. 타노스가 악당이 된 이유는 한정적 자원을 전 우주가 나눠 쓰기 위해 현재의 인구를 반으로 줄여야 한다는 소신 때문이다. 목적이 우주를 구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영웅들과 동기는 같은 셈이다.

그의 인구론적 철학이 대단히 과격하다는 게 문제이긴 하지만, 한편으로 급진적 성향을 가진 개혁주의자쯤으로 봐줄 수도 있다.

우리는 일단 개혁이라는 말에서 긍정적 뉘앙스를 느낀다. 무엇인가 내 삶을 더 좋게 만들어주는 일이 벌어질 것이라는 기대감을 품게 한다. 정치인들이 입만 열면 개혁이라는 말을 쏟아내는 것도 이런 이유일 것이다.

그런데 개혁이라는 것은 기존의 틀을 부수고 뒤집어엎는 데서 출발한다. 따라서 개혁을 당하는 쪽에서는 개혁을 주도하는 쪽이 곱게 보일 리 없다.

동전의 양면처럼 결국 보는 방향에 따라 개혁은 영웅일 수도, 악당일 수도 있다. 어벤져스 같은 영화 속 악당들이 관객의 호응을 얻는 것은 흑과 백처럼 뚜렷이 선악이 나뉜 것이 아니라 그들의 행동이 그 나름대로 타당성을 가지고 해석의 여지를 남겨주기 때문이다.

자본시장에는 오래전부터 이런 악당 노릇을 하는 조직이 있다. 투자자 보호와 산업의 투명성 확보를 위해 규제의 칼날을 휘두르는 금융감독원이다. 금감원이 하는 일은 기본적으로 정의 구현이다. 그런데 그 결과가 때로는 투자자의 원성을 사기도 하고, 반대로 금융사로부터 비판을 받기도 한다.

최근 금감원이 새 수장을 맞이했다. 신임 원장이 오자마자 금융위원회와 대립하는 모습도 보이고, 뭔가 변화가 마구 일어날 것 같은 기대도 든다.

어벤져스의 악당 타노스가 당당한 것은 철학이 굳건해서다. 시종일관 전차처럼 소신과 목표를 향해 돌진하기 때문에 누가 뭐라고 해도 흔들리지 않는다.

금감원이 최근 삼성바이오로직스 때문에 비판을 듣는 것은 소신도 상황에 따라 변할 수 있다는 일면을 보여줬기 때문이다.
같은 기준을 놓고 '그때그때 달라요'라는 모습을 보이면 시장 참여자들은 불안해진다. 금감원이 '악당 노릇'을 두려워 할 필요는 없다. 그런데 소신과 철학이 오락가락하면, 그때는 진짜 악당이 된다.

ahnman@fnnews.com 안승현 증권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