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칼럼

[데스크칼럼] 서열문화와 갑질

정순민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18.05.13 17:24

수정 2018.05.15 08:30

[데스크칼럼] 서열문화와 갑질

외국영화에 한국과 관련한 내용이 나오면 반갑다. 전 세계 젊은이들의 혼을 쏙 빼놓고 있는 마블의 '어벤져스:에이지 오브 울트론'엔 서울 거리가 30여분간 나온다. 악당 울트론의 비밀기지가 한강변 세빛둥둥섬에 차려지면서 어벤져스 군단이 악의 무리를 처단하기 위해 서울로 집결한다. 또 올해 초 개봉한 어벤져스 시리즈 '블랙펜서'는 부산을 무대로 했을 뿐 아니라 한국어 대사도 몇 마디 나온다. 자갈치 아지매 역을 맡은 미국 배우의 우리말 대사와 부산 사투리가 서투르기 짝이 없지만 이 역시 유쾌한 경험이 아닐 수 없다.

세계적인 경영사상가 말콤 글래드웰의 저서 '아웃라이어'에도 한국이 등장한다.
성공의 기회를 발견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룬 이 책 어디에 대한민국이 등장할까. 글래드웰은 창의적 의사결정을 방해하는 전근대적 서열문화를 거론하면서 1997년 괌에서 발생한 대한항공기 추락사고를 언급한다.

1997년 8월 5일 새벽 괌 공항 상공.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폭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9800시간의 비행 경험이 있는 기장은 전혀 긴장하는 기색이 없었다. 기장은 서울~괌 항로를 벌써 여덟차례 왕복했을 뿐 아니라 이 정도의 폭우는 VOR(무선거리측정기) 같은 첨단장비가 커버해줄 것으로 여겼다.

그런데 도대체 왜 대한항공기는 괌 공항 전방 4㎞ 지점에 있는 니미츠힐에 정면 충돌했을까. 사고의 원인을 밝혀내기 위해 글래드웰은 블랙박스에 남아있던 기장과 부기장의 대화를 면밀하게 검토한다.

글래드웰은 비구름을 뚫고 내려온 후 부기장이 혼잣말처럼 내뱉은 "(활주로가) 안 보이잖아"라는 말에 주목한다. 문제를 최초 발견한 부기장이 조금만 더 적극적으로 의사결정에 참여했더라면, 그리고 비행기 조종실이 더 자유로운 의견 개진이 가능한 수평적 의사소통 구조를 가지고 있었더라면 추락을 모면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게 글래드웰의 주장이다. 훗날 이뤄진 조사에 따르면 부기장이 (기장의 권위에 눌려 머뭇거리지 말고) 문제를 인지한 그 시점에 조종간을 당겼더라면 충돌을 피할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이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글래드웰은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 국가에 남아있는 경직된 위계질서가 결국 비행기를 추락시키는 원인을 제공했다"고 조심스럽게 진단하면서 "위계질서와 권위를 얼마나 존중하는지를 나타내는 권력간격지수(PDI)가 높은 나라일수록 비행기 추락 발생빈도도 높다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말했다.

대한항공기 괌 추락사고는 지금 대한민국에 광풍처럼 몰아치고 있는 대한항공 오너 일가 갑질 파문과 묘하게 겹친다. 삐뚤어진 서열의식의 끝판왕이 갑질이라는 점에서 그렇다. 이번 사건은 해외 언론들에 의해서도 대서특필됐는데, 뉴욕타임스는 이 사건을 보도하면서 'Bossiness(위세부림)'라는 단어를 놔두고 굳이 'Gapjil(갑질)'이라고 표기했다.
그러면서 "마치 봉건시대 영주처럼 아랫사람이나 하도급업자를 다루는 행위"라는 부연설명까지 달았다. 주지하다시피 갑질에 대한 이 긴 설명의 행간에는 전근대적 서열문화에 대한 비아냥이 담겨 있다.
동일 사건을 다룬 CNN의 뉴스 진행자들 역시 입가에 묘한 미소를 지으며 이 사건을 코미디처럼 보도하긴 마찬가지였다. 한국 이야기가 나오는 외국영화를 볼 때와 달리 입맛이 씁쓸했던 건 나 혼자뿐이었을까.

jsm64@fnnews.com 정순민 문화스포츠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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