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칼럼

[차장칼럼] 화담 구본무를 회상하며

최갑천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18.05.30 16:54

수정 2018.05.30 21:44

[차장칼럼] 화담 구본무를 회상하며

'이웃집 아저씨'. 딱 그랬다. 5년 전쯤 화담(和談)을 가까이서 봤던 첫인상은 평범한 촌부의 모습으로 다가왔다. 으레 대기업 회장들의 트레이드마크인 한 올 흐트러짐 없이 넘긴 머리 스타일이나 근엄한 표정과는 거리가 멀었다. 기회만 된다면 소주 한잔 나누며 편하게 이야기 나누고픈 충동이 느껴졌다. 그는 총수 시절에도 얼음같이 시원한 소주를 즐겼다고 한다. 아쉽게도 이후 그와 직접 대화를 나눌 기회는 영영 얻지 못했다.
지난 20일 구본무 LG 회장은 일흔셋의 나이에 세상과 작별했다. 100세 시대에 너무나 빨리 떠났기에 일면식 없는 일반인들도 허망해했다. 더욱이 투병 중에도 "폐 끼치지 않겠다"며 마지막 길마저 최대한 조용히 갔다. 현장에 투입된 기자들이 취재거리가 없어 발을 동동 구를 정도였다. 화담은 그렇게 자신이 좋아하던 숲으로 돌아갔다. 내 기억에는 주요 그룹 회장이 별세 직후 수목장으로 영면한 건 처음인 듯싶다. 1998년 별세한 최종현 SK 회장은 10주기 때 유지에 따라 화장했다. 화담과 수십년간 친분을 나눈 한 경제계 인사는 "내가 알던 그답게 갔다"고 전했다.

기자가 화담을 마지막으로 봤던 불과 1년 반 전까지도 그는 건재했다. 그때도 그의 소탈한 품성을 목격했다. 늦가을이던 2016년 11월 서울 여의도 LG 트윈타워에서 열린 'LG글로벌챌린저' 시상식 때였다. 당시 화담은 넥타이를 하지 않은 편안한 감색 양복 차림으로 대학생 수상자들에게 직접 시상하기 위해 단상에 올랐다. 이때 호명된 수상자와 표창장의 이름이 다른 실수가 있었다. 행사장은 잠시 어수선한 분위기가 연출됐다. 화담도 잠시 멋쩍은 표정을 짓더니 이내 대수롭지 않은 듯 대처했다. 그룹 총수가 직접 시상하는 상황에서 벌어진 일이라 진행요원들이 크게 당황할 수밖에 없던 순간이다. 화담은 "허허, 그럴 수도 있지"라며 웃음으로 상황을 넘겼다. 화담의 조용한 퇴장은 오히려 큰 울림을 남기고 있다. 재계 한 총수는 사석에서 "구 회장의 마지막 모습은 앞으로 재계의 장례문화를 바꾸는 계기가 될 것 같다"고 했다.

지금 우리 사회는 반재벌·반기업 정서가 만연하다. 자신의 지위와 권력을 앞세워 '갑질'이나 특권의식을 당연시하는 일부 기업인의 책임이 크다. 글로벌 경영과 '워라밸(일과 삶의 균형)'의 시대에 이들이 설 자리는 더 이상 없다. 재계를 담당하면서 아랫사람들을 중시하고, 존중하는 많은 기업인을 봤다. 말단 사원들 생일을 직접 챙기고, 수십년 어린 직원들을 깍듯하게 존대하는 경영인들이 대세다.

'한강의 기적'을 몸소 이끈 창업주들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창업주 아버지 밑에서 혹독한 경영수업을 받고 그룹을 글로벌 반열에 올려놓은 2세 오너 경영인들도 거의 남아 있지 않다. '산업보국'을 외치며 근면과 성실을 최고의 기업문화로 여겼던 그들의 시대는 과거의 유물일 뿐이다.
상명하복식 조직은 글로벌 시장에서 생존이 불가능하다. 소통과 수평의 시대다.


'정겹게 이야기하며 살고 싶은' 마음에 아호를 화담으로 삼은 '미스터 LG'가 세상과 작별하면서 던진 교훈이기도 하다.

cgapc@fnnews.com 최갑천 산업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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