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칼럼

[데스크 칼럼] 태영호의 시선

최진숙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18.05.31 16:47

수정 2018.05.31 21:46

[데스크 칼럼] 태영호의 시선

영국 주재 북한공사 출신 태영호의 증언 '3층 서기실의 암호'는 북·미 핵 담판이 급물살을 타고 있는 와중에도 서점가 베스트셀러 1위다. 출간 보름 만에 5만부가 팔렸다.

태영호 증언을 따라가면 지금 북한 외교를 뒤흔드는 철의 얼굴들에게서도 인간적인 면모가 느껴진다. 김정일 시대 권력실세 '3층 서기실'의 리명제 실장 아들 리용호 외무상. 지난해 6차 북핵실험 직후 전 세계 비난의 십자포화 속에서도 눈 하나 깜짝 않고 가차없는 선제공격 엄포를 날렸던 인물이다. 이런 리용호가 김정일에게 호되게 야단 맞은 에피소드가 있는데 그건 골프 때문이었다. 2003년 영국대사로 부임해 부하직원 다섯명과 영국국적 한국인에게 비밀 골프레슨을 받다 들통이 났다.
리용호는 '영국주재 외교관으로 골프가 일에 도움이 될까 하여 시작했지만, 죽을죄를 지었다. 다신 안하겠다'는 비판서를 평양으로 바로 보냈다. 태영호는 명석한 두뇌, 너그러운 상사로 그를 떠올린다.

2015년 에릭 클랩턴 기타 라이브공연을 직접 보기 위해 북에서 런던으로 날아온 김정은 친형 김정철은 전형적인 한국 재벌가 갑질을 연상케 하는 면모가 분명 있긴 했으나 실체는 세상물정 모르는 '비운의 황태자'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 같다. 승용차 안에서 '마이웨이'를 부르며 눈가에 이슬이 맺혔던 그의 모습에 태영호는 연민을 품기도 했다.

태영호의 기억에 김일성 시대 1970년 초반까지는 그래도 살만했던 모양이다. 평양과 지방에 격차가 크게 없었고 소소할지언정 이웃 간에 나눠먹을 만한 게 있긴 있었으며, 혁명의 대의를 품고 살아도 자괴감을 느끼지 않을 정도로 체제모순은 수면 아래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1980년대 북의 실질적 지배자가 된 김정일 체제 이후 북한은 '봉건사회'로, 그 뒤 30년이 지나 바람처럼 등장한 김정은이 마침내 북한을 '노예사회'로 완성해냈다는 게 태영호의 분석이다.

'백두혈통'인 건 맞지만, 이것저것 숨길 게 많았던 김정은이 자신의 체제유지 수단으로 삼은 장치가 숙청과 공포정치, 그리고 핵이라는 사실은 익히 알고 있다. 어느 순간 북의 권력 중심부로 단숨에 들어와, 자신을 비난하는 세계 각국을 향해 불바다를 외쳤던 '로켓맨'은 이제 세상과 딜을 시도한다. "나의 체제를 보장하라. 너희 잣대로 우릴 보지 마라. 그러면 선대부터 목숨 걸고 이룩한 생명 같은 핵을 완전히 버리겠다." 태영호는 이 대목에서 "핵 포기 같은 건 절대 없을 것"이라고 단언하지만 이와 대조적으로, 우리 정부는 세상 그 누구보다 김정은의 약속을 굳게 믿고 있다.

공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에게 이미 넘어갔다. 본능과도 같은 협상술로 일거에 북을 제압한 트럼프는 6월 12일 전 세계를 향해 외치고 싶을 것이다.
"결국 내가 해냈어! 오바마도, 클린턴도, 부시도 못했던 그 일을!" 우리는 거래의 달인이자 엄청난 에너지의 과시형 미국대통령을 만나 지금의 극적인 순간까지 오게 됐지만, 6월 12일 이후 상황은 사실 예측 불가능이다. 트럼프 협상의 원칙 중 기본 가운데 가장 기본은 '높은 목표와 그것을 향한 전진'이다.
이런 와중에 미 보수언론은 철저히 미국 이익의 관점에서 협상하라는 압박을 가하고 있다. 트럼프의 목표와 능력, 여기에 매달린 한반도 운명이 아슬아슬하다

jins@fnnews.com 최진숙 국제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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