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사회일반

'서촌의 눈물'… 상권 띄워놓고 쫓겨나는 상인들

김규태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18.06.17 16:59

수정 2018.06.17 21:26

'제2의 궁중족발' 수두룩
기껏 매출 올려놨더니.. 지속적으로 임대료 올리거나 "가게 비워라" 재계약 거부
"월세 많이 받게 해 주겠다" 부동산이 임대료 상승 조장도
과거 궁중족발 가게 입구가 트럭으로 막혀 있고, 창문 유리 등이 깨져 있다. 지난 7일 이곳에서 족발집을 운영하던 김모씨가 임대차 재계약을 거부하는 건물주를 둔기로 폭행한 혐의(살인미수)로 구속됐다. 사진=김규태 기자
과거 궁중족발 가게 입구가 트럭으로 막혀 있고, 창문 유리 등이 깨져 있다. 지난 7일 이곳에서 족발집을 운영하던 김모씨가 임대차 재계약을 거부하는 건물주를 둔기로 폭행한 혐의(살인미수)로 구속됐다. 사진=김규태 기자

서울 체부동 일명 '서촌 먹자골목'에서 10년간 음식점을 운영해 온 박순영씨(가명·여)는 최근 밤마다 잠을 설친다. 한달 전 건물주가 월 임대료(월세)를 두 배로 올려 줄 것을 통보했기 때문이다.
박씨는 건물주에게 '매출이 그대로인데 가게 사정을 봐달라'고 했지만 소용 없었다. 그는 "월 임대료를 10만~20만원씩 올린 적은 있어도 이렇게 큰 돈을 요구한 건 처음이었다"며 "누가 봐도 점포를 빼달라는 소리인 것 같은데 권리금도 못 받고 쫓겨날까 걱정"이라고 토로했다.

박씨는 특히 인근 부동산 업소들의 행태에 혀를 내둘렀다. 그는 "부동산 업소에서 먼저 '이 정도면 족히 얼마를 받는다'는 식으로 임대료를 올리도록 건물주를 부추긴다"고 주장했다. 박씨는 "서촌이 유명해지면서 원래 장사하던 사람은 대부분 떠났다. 상당수 음식점들도 짐 싸야할 판"이라고 한숨을 쉬었다.

17일 임차인 등에 따르면 서촌 곳곳에서 박씨와 같은 이유로 건물주와 임차인 간에 갈등이 심화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한옥마을, 문화유산 같은 다양한 볼거리로 유동인구가 늘자 일부 건물주가 임대료를 크게 높이거나 기존 임대차 계약의 갱신을 거부하면서 임차인이 반발하는 것이다. 부동산 업소들이 임대료 인상에 앞장선다는 지적도 나온다.

17일 서울 체부동 일명 서촌 먹자골목. 이곳에선 건물주와 임차인 간에 임대료 문제 등으로 갈등이 빈번히 벌어진다고 한다.
17일 서울 체부동 일명 서촌 먹자골목. 이곳에선 건물주와 임차인 간에 임대료 문제 등으로 갈등이 빈번히 벌어진다고 한다.


■재계약 거부에 9년 된 막국수 집도 문 닫을 판

최근 발생한 '궁중족발 둔기 폭행' 사건은 이 지역에서 나타나는 전형적인 갈등 사례가 표면화된 것이라는 분석이다. 이는 지난 7일 서촌에서 족발집을 운영하던 김모씨(55·구속)가 임대차 재계약을 거부하는 건물주를 둔기로 폭행해 발생했다. 현행 상가건물임대차보호법에서는 최초 5년간의 임대차 계약을 보장하고 있지만 김씨의 경우 보호 기간이 지나 재계약 문제로 이씨와 법정공방 등 수년째 다툼을 해왔다.

맘편히장사하고픈상인모임인 쌔미 조직국장은 "족발집 인근에서 10년째 고깃집을 하던 가게도 임대료가 급등하자 상담을 신청해왔다"며 "서촌 일대에서 궁중족발 같은 갈등 사례는 빈번히 발생한다"고 했다.

서촌에서 막국수 가게를 운영하는 김모씨(47·여)도 재계약 문제로 건물주와 3년째 법적 분쟁을 벌이고 있다. 김씨는 9년 전 1억원의 권리금을 내고 가게를 리모델링해 영업했지만 이제 한푼도 받지 못한 채 떠나야할 처지다. 그는 "처음 가게를 개업하자 손님이 줄을 설 정도로 장사가 잘됐다"며 "임대료도 3년 만에 2배 넘게 올려줬다"고 했다.

문제는 가게를 연 지 5년이 지난 때 건물주가 재계약을 거부하며 발생했다. 김씨는 "임대료를 올려 준다고 했지만 건물주는 무조건 나가길 원했다"며 "아무도 찾지 않던 곳을 줄서서 먹는 가게로 바꾸고, 가게 수리도 다 했는데 나가라고 하니 궁중족발 사태가 남의 일 같지 않다"고 했다. 김씨는 지난주부터 현행 임대차법의 개정을 촉구하며 청와대 분수대 앞에서 1인 시위를 하고 있다.

■부동산이 임대료 인상 부추긴다는 지적도

특히 지역 상인들은 갈등의 원인 중 하나로 일부 부동산 업소의 영업행태를 지목한다. 부동산 업소들이 경쟁적으로 "임대료를 올려주겠다"며 건물주들을 부추긴다는 것이다. 수년간 이 지역에서 부동산 업소를 운영해 온 공인중개사 A씨는 "서촌에는 상당수 건물주들이 예전부터 주인이던 사람들이어서 원래 임대료를 크게 올리거나 하진 않았다"며 "그러나 최근 몇몇 부동산 업소들이 건물주에게 먼저 '임대료를 올리자'고 부추기면서 건물주와 세입자 간 갈등을 발생하고 있다"고 전했다.


치솟는 임대료에 임차인들이 권리금을 받지 못하고 점포를 정리하면 부동산 업소는 다른 임차인을 구하고 알선 대가로 돈을 챙길 수 있다는 것이다. A씨는 "상도덕에는 어긋나는 행위지만 서로 다 알고도 쉬쉬한다"고 털어놨다.


이 지역의 다른 건물 임차인은 "궁중족발 사태가 터지자 임차인과의 상생을 말하기는커녕 오히려 '임대료를 얼마 정도 받아야겠다'면서 올려달라고만 해 걱정이 크다"며 "건물주 입장에서는 부동산 업소에서 알아서 올려준다고 하니 거부할 이유도 없다"고 했다.

integrity@fnnews.com 김규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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