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을 볼 수 없는 당신과 함께 저어가는 자전거

[감동시리즈-우리함께] ① 시각장애인 조승현씨와 소방관 이종욱씨의 '특별한 국토종주'
10년전부터 호흡 맞춘 탠덤사이클 파트너.. 장애-비장애 넘어 2인용 자전거 함께 탑니다
내리막·오르막·굽이진길 말하지 않아도 작은 움직임만으로 다 느껴집니다
앞바퀴·뒷바퀴 함께 굴러가야 가는 것처럼 저희도 서로가 없이는 갈 수 없습니다

매일 신문지상에는 살인, 강간, 폭행 등 흉흉한 소식이 넘쳐나지만 사실 우리 사회 이면에는 우리들의 마음을 푸근하게 하는 아름다운 이야기들이 숨어 있다. 'First-Class 경제신문' 파이낸셜뉴스가 창간 18주년을 맞아 연재를 시작하는 '감동 시리즈-우리 함께'는 이런 아름다운 이야기를 통해 우리들 마음에 깃들어 있는 선함을 일깨우고, 일상에서의 작은 실천을 통해 조금은 더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어나가고자 한다. 우리가 걸어가야 할 길을 낮은 목소리로 안내하는 그들과의 만남을 시작한다. <편집자주>

인천 남부소방서 이종욱 구조대장(왼쪽)과 시각장애인 사이클 선수 조승현씨는 지난달 말 탠덤사이클(2인용 자전거)을 타고 인천 아라뱃길부터 부산까지 800㎞를 내달리는 국토종주에 나섰다. 사진=박범준 기자
빛은 눈이 아닌 마음으로 들어오는 걸까. 우리는 눈으로 세계를 본다. 하지만 마음으로 기억한다. 그리하여 풍성한 인생이란 눈보다 마음으로 본 게 많은 사람일지도 모르겠다. 소방관과 시각장애인이 함께 자전거를 탔다. 서로 눈을 마주칠 수 없지만 기억할 수 있다. 자전거를 탈 때 빛나던 그 길을.

지난 12일 인천 남부소방서 119구조대에서 이종욱 구조대장(52)과 시각장애인 사이클 선수 조승현씨(72)를 만났다. 두 사람은 10년 전부터 탠덤사이클 파트너다. 탠덤사이클이란 눈이 되어주는 비장애인과 시각장애인이 앞뒤로 함께 탈 수 있는 2인용 자전거다. 이 구조대장은 앞에서, 조씨는 뒤에서 함께 자전거 페달을 밟아나간다. 두 사람은 지난 5월 말 국토종주를 다녀왔다. 인천 아라뱃길에서 출발해 부산까지 800㎞를 3박4일간 자전거로 내달렸다. 이 대장은 "원래 4박5일 코스였어요. 워낙 조 선수와 호흡이 잘 맞아서 하루 200㎞씩 달리다보니 일찍 도착했습니다. 조 선수 열정이 대단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죠"라고 말했다. 조씨도 파트너인 이 대장에 대한 자랑을 빼놓지 않았다. "과묵한 이 대장은 첫 만남부터 신뢰가 갔습니다. 자전거를 탈 때 느껴지는 흔들림 없는 완벽한 일체감은 이 대장하고만 느낄 수 있어요."

서로 눈과 다리가 되어주는 둘의 팀워크는 빛난다. 탠덤사이클 대회에서 메달 여러 개를 땄다. 국토종주뿐 아니라 4대강 일주, 섬진강, 영산강을 자전거로 돌았다. 침낭만 매고 자전거를 타다 팔각정 아래서 밤을 지새우기도 했다. 이 대장은 "시각장애인과 일회성으로 자전거를 타는 분들은 많지만 저희처럼 10년간 함께하는 경우는 드물다. 호흡이 맞다보니 대회에 나가 경륜 선수들과 겨뤄서도 이겼다"며 뿌듯해했다.

10년간 함께 자전거를 타면 말하지 않아도 안다. 속도가 생명인 사이클 위에서 앞이 보이지 않는다는 건 위험과 직결된다. 팀워크가 생명이다. 이 대장은 "처음에는 (조 선수를 위해) 앞에 커브길이나 턱이 있다고 얘기를 했어요. 지금은 말하지 않아도 내 몸동작으로 예측을 하시는 것 같아요"라며 웃었다. 조씨는 "앞에 장애물이 있으면 자연히 이 대장의 페달 속도가 느려지고 엉덩이를 살짝 드는 기운이 전달됩니다. 저도 같은 자세를 취하는 거죠"라고 말했다.

조씨는 지난 국토종주에서 오르막길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했다. "문경새재 올라갈 때는 바퀴가 제자리에서 헛돌 만큼 경사가 가팔라요. 땀이 쏟아지고 가슴이 터질 것 같아요. 아휴, 내가 이걸 왜 타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그래도 이를 악물고 페달을 밟는 거예요." 그러자 옆에 있던 이 대장이 거든다. "그 뒤에는 쌩쌩 달릴 수 있는 내리막길이 있거든요." 자전거는 두 사람을 하나로 만든다. 마치 바퀴 두 개로 한 길을 가는 것처럼.

자전거는 두 사람을 하나로 만든다. 마치 두 개의 바퀴로 한길을 가는 것처럼.
두 사람이 코스를 지날 때마다 스탬프를 찍은 자전거 국토종주 수첩.


■시각장애인과 함께 보는 풍경

소설가 레이먼드 카버의 단편 '대성당'에는 시각장애인에게 TV 속 대성당을 설명하는 남자가 나온다. 소설 속 두 주인공은 보고도 말하기 어려운 대성당을 묘사하기 위해 함께 펜을 잡고 그림을 그린다. 카버는 소설을 통해 때론 볼 수 없는 사람에게 보는 법을 배울 수 있다는 삶의 진실을 말하고 싶었던 듯하다.

우리는 실로 볼 수 있는 것일까. 탠덤사이클 위에서 이 대장은 자신이 표현할 수 있는 언어를 끄집어내기 위해 애썼다. 길섶에 핀 들꽃을 발견했을 때, 멀리 보이는 호수가 천천히 흔들릴 때, 언덕 너머로 푸른 솔밭이 펼쳐질 때를 조씨에게 전하려 애썼다. 이 대장은 "멋진 풍경이 있으면 잠시 멈춰 제가 설명을 합니다. 하지만 꽃 이름을 잘 모르는 게 문제예요"라며 웃었다.

시각장애인인 조씨는 온몸으로 풍경을 본다. 그는 "산에서는 차가운 공기가, 강가에서는 강물 냄새가 난다"며 "뜨거운 아스팔트를 자전거로 갈 때와 모래알이 탁탁 종아리를 건드리는 흙길은 또 다르다"고 설명했다. 조씨가 자전거로 지나온 길은 마음속으로 흘러들어온다. 이 대장 또한 자신이 그전까지 보지 못한 걸 보게 된다. 보이는 대로 쉽게 말하는 것이 아니라, 볼 수 없는 누군가에게 풍경을 설명하고자 할 때 삶은 더 세세해진다. 자전거 체인이 무수한 쇳조각으로 연결된 것처럼 그 세세함 속에 이 대장과 조 선수를 연결 짓는 게 있다.

■장애극복이 아닌, 모두의 도움

흔히 사람들은 탠덤사이클에 탄 시각장애인은 페달에 다리만 얹으면 되는 것 아니냐고 묻는다. 조씨는 모르는 소리라며 고개를 젓는다. 그는 "50㎏ 나가는 무게를 뒤에 지고 자전거를 타본 적이 없어서 그렇다"며 "이 대장과 함께 자전거를 타기 위해 개인적인 노력도 많이 한다"고 했다. 조씨는 고희를 넘겼지만 몸에 군살이 없다. 사이클 머신 위에서 그는 끊임없이 홀로 연습하고 체력을 기른다. 이 대장과 함께 자전거를 타는 즐거움을 만끽하고 싶기 때문이다. 조씨는 2002년 처음 앞이 안 보이기 시작했다. 포도막염 때문이었다. 눈앞에 검은 커튼이 쳐진 것처럼 온통 어둠 속에서 지냈다. 하지만 그는 무너지지 않았다. 2003년 장애인 재활을 돕는 단체 '라이프존'을 결성, 장애인 인식 개선 활동을 했다. 그중 조씨가 가장 좋아하는 게 사이클이다. 그는 "오직 내 힘으로 성취할 수 있는 만족감이 자전거 아닐까요. 자전거를 타고 온갖 언덕길을 오르면 더 이상 무서울 게 있겠느냐는 여유가 생긴다"며 웃었다. 조씨는 인터뷰 내내 이 대장과 장애인 활동보조인에게 감사를 표시했다. 시각장애인이 자전거를 타는 데 있어 혼자 힘이 아니라 무수한 도움이 필요하다는 이유에서다. 그는 "장애극복 같은 틀에 박힌 말은 싫다. 누군가가 있었기 때문에 지금껏 사이클에 오를 수 있었다"며 미소 지었다.

조승현 선수(오른쪽)와 그의 파트너인 이종욱 구조대장이 함께 길을 걷고 있다.

■자전거 바퀴 안에서 하나가 되다

화재 현장에서 사람을 구조하는 이 대장은 앞을 볼 수 없는 상황과 싸워왔다. 화재가 난 집 문을 열어젖히는 순간 검은색 연기가 치솟는다. 한 치 앞도 안 보이는 불 속에서 손을 뻗으며 사람을 구해냈다. 감히 짐작하건대 조씨가 처음 눈앞이 어두워지기 시작했을 때, 앞에 있는 사람의 얼굴을 볼 수 없게 됐을 때 들던 절망감 역시 불타는 집에 갇힌 기분이 아니었을까. 이 대장이 건넨 손으로 조씨는 어두운 집을 빠져나와 달린다. 조씨가 뒤에서 받쳐주는 동력으로 이 대장은 지치지 않는다. 이 대장은 "조 선수와 함께 하면 삶이 풍성해진다"고 말했다. 조씨는 "이 대장과 자전거를 타고 멀리까지 다녀온 힘으로 1년을 편안하게 산다"고 화답했다. 서로의 믿음 없이는 나아갈 수 없다. 빨리 가기 위해선 혼자 가지만, 멀리 가기 위해선 둘이 되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다.

이 대장과 조씨는 사이클에 올라 출발할 때 "하나, 둘"하고 페달을 돌린다. 탠덤사이클은 둘이 똑같이 페달을 굴려야 한다. 둘 중 하나라도 엇나가면 자전거는 오래 달릴 수 없다. 자전거 페달이 굴러가고 체인이 돌아간다. 같은 속도로 다리에 힘을 주고 함께 이를 꽉 문다. 동시에 숨을 들이마시고 내쉰다.
사이클복을 입은 둘의 팔과 다리는 똑같이 구릿빛으로 빛났다.

junjun@fnnews.com 최용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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