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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2인자 JP 지다] 킹이 되지 못한 킹메이커.. 현대사 영욕의 정치거목 잠들다

심형준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18.06.24 17:27

수정 2018.06.25 10:05

김종필 전 총리 별세 박정희 도와 5·16쿠데타 주도 군사 독재정권 암흑기 장본인
김영삼·김대중 당선 도우며 최고의 킹메이커로 인생 2막
"영원한 동지도 적도 없던" '3金시대' 역사속으로…
1 김종필 전 국무총리가 공화당 총재 시절인 1989년 서울 마포 가든호텔에서 당시 민주당과 평민당 총재였던 김영삼·김대중 전 대통령과 악수하고 있다(왼쪽부터 김영삼·김대중·김종필 총재). 김 전 총리가 23일 향년 92세로 별세하면서 '3김 시대'의 주인공 모두가 역사의 인물이 됐다. 2 김종필 전 국무총리가 1972년 7월 국회 대정부질문에서 여야 의원들의 각종 현안 관련 질문에 답변하고 있다. 3 김종필 전 국무총리가 1971년 당시 박정희 공화당 총재(오른쪽)로부터 부총재 임명장을 받고 있다. 정치계 풍운아로 불린 고 김 전
1 김종필 전 국무총리가 공화당 총재 시절인 1989년 서울 마포 가든호텔에서 당시 민주당과 평민당 총재였던 김영삼·김대중 전 대통령과 악수하고 있다(왼쪽부터 김영삼·김대중·김종필 총재). 김 전 총리가 23일 향년 92세로 별세하면서 '3김 시대'의 주인공 모두가 역사의 인물이 됐다. 2 김종필 전 국무총리가 1972년 7월 국회 대정부질문에서 여야 의원들의 각종 현안 관련 질문에 답변하고 있다. 3 김종필 전 국무총리가 1971년 당시 박정희 공화당 총재(오른쪽)로부터 부총재 임명장을 받고 있다.
정치계 풍운아로 불린 고 김 전 총리는 지난 23일 오전 8시15분 향년 92세로 별세했다. 4 노태우 전 대통령이 1990년 1월 고 김영삼 전 대통령이 민주당 총재이던 시절 고 김종필 전 국무총리(오른쪽)와 함께 3당 합당을 발표하고 있다. 연합뉴스


고 김종필(JP) 전 국무총리만큼 굴곡진 대한민국 현대사에서 풍운아로 불린 이도 없었다.

박정희 전 대통령과 5·16쿠데타 공신으로 공화당을 통해 정치에 입문한 그는 한때는 유신정권의 부역자로 꼬리표가 붙었다. 또 한때는 민주정부 탄생의 산파 역할로 민주화 시대 개막의 1등 공신으로 추앙도 받았다.

김 전 총리는 이처럼 충청권의 맹주, 9선 국회의원, 대통령을 두번 당선시킨 킹메이커로 역사의 질곡마다 영욕의 세월을 보냈지만 명암도 뚜렷했다.

공화당 시절에는 부패혐의로 가택연금을 당하는 우여곡절도 겪었고 2004년 17대 총선에선 그가 이끌던 자민련이 몰락하며 정계은퇴의 길도 겪었다.

무엇보다 김 전 총리는 김대중·김영삼·김종필 트로이카가 이끌어왔던 '3김(金) 시대'의 마지막 주인공이라는 점에서 그가 차지하는 한국 정치사의 의미가 깊다.

■실세 총리, 9선 정치인, 민주정부 공동창업자

JP의 정치입문은 대한민국 격동의 시대였던 1961년 5·16 군사정변과 맞물려 있다.

김 전 총리는 1961년 처삼촌인 박정희 전 대통령을 도와 5·16 쿠데타를 주도했다. 그래서 그가 민주화 시대 개막에 기여한 공헌에도 불구하고 유신정권의 부역자라는 꼬리표가 따라다녔다. 4·19혁명으로 국민적 기대에 부푼 민주화 시대를 종식시키고 군사독재 정권을 통해 대한민국을 암흑기로 되돌린 장본인 중 하나였다. 또 그가 만든 중앙정보부는 군사정부 시절 민주화운동 탄압의 선봉에 선 것은 물론 정권 유지를 위해 야당 지도자들을 고문하고 불법과 탈법을 저지른 밀실 공작정치의 산실이기도 했다. 명암도 있었다.

공화당 창당과정에서 증권파동을 비롯한 이른바 '4대 의혹사건'에 휘말리면서 63년 2월 첫 외유를 떠났다. 또 한·일 국교정상화 회담의 주역으로서 이에 반대한 6·3사태가 발발하자 2차 외유의 길을 나섰다.

어두운 과거사에도 불구하고 JP의 인생 2막은 더욱 크게 빛났다.

정치적 라이벌이자 파트너였던 김대중·김영삼 두 전직 대통령이 대권을 쥐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것도 김 전 총리였다.

1992년 대선에서 3당 합당과 함께 김영삼(YS) 당시 대선 후보를 지원해 군부정권 시절을 종식하고 첫 민간인 출신 대통령 시대를 열었다.

또 1997년 대선에선 자신이 이끌던 자유민주연합 후보로 다시 대권에 도전했으나 'DJP(김대중·김종필) 연합'을 통해 단일화로 김대중 전 대통령의 당선을 도왔다. 첫 수평적 정권 교체였다.

이처럼 늘 실세로 정권 2인자로 군림했던 그도 정치인생에는 내리막길이 있었다.

2004년 17대 총선을 통해 재기를 노렸지만 국회의원 10선 도전 실패는 물론 충청권을 기반으로 하는 그의 자민련이 선거에서 참패를 당하면서 정계은퇴로 역사의 뒤안길에 접어들게 된다.

■명암 뚜렷했던 '3김(金) 시대'도 역사속으로

김 전 총리가 활약했던 '3김 시대'는 대한민국 정치사의 암흑기이자 민주화 시대의 주춧돌을 놓은 새로운 태동기였다.

'3김 시대'는 박정희 정권 몰락의 단초가 된 1979년 10·26 사태로 서막이 열렸다. 당시 서울의 봄을 맞아 김영삼·김대중 두 야당 지도자가 대권 경쟁에 돌입하고 공화당 소속이던 김 전 총리가 맞붙었지만 세사람의 첫 경쟁은 결실을 맺지 못했다. 전두환 전 대통령의 신(新)군부가 12·12 군사쿠데타로 정권을 잡으면서다.

세 사람의 '3김 시대'가 다시 봄을 맞이한 것은 1987년 민주화 운동 이후다. 1988년 4월 치러진 총선에서 YS(통일민주당), DJ(평민당), JP(신민주공화당)는 각각 영남, 호남, 충청의 표를 결집하면서 여소야대 구도를 만들었다. 세 지도자가 대한민국 정치를 3분할하고 전성시대를 맞이한 때였다.

'3김 시대'는 명암도 뚜렷했다.
세 사람이 군사정부를 종식시키고 민주화시대의 단초를 제공했다. 하지만 동시에 지역주의와 제왕적 총재, 가신들의 밀실정치의 한계도 보였다.


세 사람이 한때는 동지로 한때는 물러설 수 없는 라이벌로 대척점에 서서 "영원한 동지도 적도 없다"는 정치현실도 보여줬다.

cerju@fnnews.com 심형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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