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인찬 칼럼]

스튜어드십 코드 도입에 난 반대다

지령 5000호 이벤트

국민연금 여전히 외풍에 취약
정치가 맘대로 주무를까 걱정
지금 강행하면 정권코드 변질

스튜어드(Steward)는 집사 또는 청지기란 뜻이다. 집사는 주인을 정성껏 모신다. 스튜어드십 코드는 집사정신이다. 앤소니 홉킨스가 주연한 영화 '남아있는 나날'(The Remains of the Day)에 보면 집사 스티븐스(홉킨스)는 자를 들고 접시, 포크를 놓을 자리까지 잰다. 주인을 깍듯이 섬기는 태도가 거의 신앙에 가깝다.

국민 노후자금을 관리하는 국민연금이 이르면 7월부터 스튜어드십 코드를 도입한다. 집사처럼 우리를 섬기겠다니 고마운 일이다. 하지만 난 국민연금의 과잉 친절이 좀 거북하다. 이리저리 재다 접시를 깨뜨리면 어쩌나 걱정이 앞서서다.

예를 들어보자. 문재인 대통령은 대선 때 "국민연금의 주주권 행사를 강화하겠다"고 약속했다. 공단 이사장엔 전직 정치인을 내려보냈다. 그 뒤 국민연금은 주총에서 부쩍 목소리를 높였다. 지난해 11월엔 KB금융 주총에서 노조가 추천한 사외이사에 찬성표를 던졌다. 안건은 압도적으로 부결됐다. 국민연금은 엉뚱한 짓을 했다.

박능후 보건복지부 장관은 지난 5월 말 기금운용위원회에서 "국민연금이 대한항공의 2대 주주로서 주주권을 행사하겠다"고 말했다. 기금운용위는 국민연금 지배구조에서 최상위 기구다. 박 장관은 당연직 위원장이다. 장관은 대통령이 임면권을 갖는다. 기금운용위는 구조적으로 정치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더불어민주당 권칠승 원내부대표는 최근 포스코 회장 선출과 관련해 "국민연금이 주주권을 적극 행사해야 한다"는 취지로 말했다. 국민연금은 포스코 지분 10.79%를 가진 최대주주다. 아직 도입도 안 했는데 벌써부터 국민연금더러 감 놔라 배 놔라 한다. 곧 시행에 들어가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안 봐도 비디오다.

국민연금 기금운용본부장 자리가 1년 가까이 공석이다. 공모를 했지만 임자를 못 찾아 재공모에 들어갔다. 설마, 국민연금은 진짜 그 이유를 모르는 걸까. 대통령, 장관, 의원이 주주권과 스튜어드십 코드를 입에 올릴 때마다 유능한 본부장 후보들은 몸을 움츠린다. 박근혜정부에서 전임자들이 어떤 일을 당했는지 똑똑히 봤기 때문이다.

지금 스튜어드십 코드를 도입하면 그 코드는 정권 코드로 변질되기 십상이다. 지배구조가 엉망이라고 다른 기업을 야단치기 전에 국민연금은 제 얼굴에 묻은 흙부터 닦기 바란다. 심지어 스튜어드십 코드 도입에 찬성하는 이들도 국민연금의 정치화를 우려한다. 한국기업지배구조원 조명현 원장(고려대 교수)이 그렇다.

대안은 없을까. 있다. 조 원장은 언론 기고 등을 통해 "국민연금이 주주권 행사를 민간 자산운용사에 맡기면 된다"고 해법을 제시한다. 스튜어드십 코드 도입에 부정적인 신장섭 교수(싱가포르 국립대)도 이 대목에선 공감한다. 모델은 일본 GPIF(Government Pension Investment Fund)다. 일본어로는 '연금적립금관리운용 독립행정법인'이라고 쓴다. '독립행정법인'이란 문구가 눈에 쏙 들어온다.

GPIF는 진작에 스튜어드십 코드를 시행 중이다. 다만 자산운용사에 권한도 주고 책임도 묻는다. 국민연금이 GPIF처럼 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 그래야 정치 입김에서 자유롭다.
의결권 찬반을 정하느라 머리를 싸맬 필요도 없다. 골치 아픈 일은 자산운용사에 맡기면 된다. 이런 사전 조치 없이 스튜어드십 코드 도입을 강행한다면, 30년째 국민연금을 붓는 가입자로서 난 반대다.

paulk@fnn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