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본영 칼럼]

폼페이오 오자 감자밭으로 간 김정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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北 체제 흔들릴까봐 두려워..베트남·중국식 개혁 망설여, 핵 포기와 개방 외 대안없어


마이크 폼페이오 미국 국무장관이 얼마 전 3차 방북 때 바람맞았다. 북한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평양을 비우고 백두산 인근 삼지연으로 현지지도 차 떠나면서다. 조선중앙통신이 내놓은 사진을 보라. 감자밭에 엉거주춤 앉은 김정은의 표정은 자못 심각했다. 비핵화 의지는 몰라도 피폐한 북한 경제를 살려보려는 간절함은 묻어났다.

그러나 공짜는 없다는 게 세상의 이치다. 사인 간 거래에서든, 국제협상에서든 마찬가지다. 북한이 최악의 경제난에서 벗어나려면 미국과 관계를 개선해 국제사회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하지만 비핵화와 개혁·개방이 필수 선결조건이다. 김정은 입장에선 도탄에 빠진 민생을 살리려면 핵을 내려놔야겠지만, 시장경제 도입 후 세습체제의 안위도 걱정스러울 게다. 잔뜩 찌푸린 얼굴에서 그의 심리적 딜레마가 읽혔다.

CNN 방송에 따르면 폼페이오는 김정은에게 줄, 엘튼 존의 '로켓 맨' CD까지 갖고 갔으나 헛물을 켰다. 그의 완전한 비핵화 요구에 북측은 "강도적 요구"라고 맞섰다. '빈손 방북'에 미국 조야의 비판이 쏟아지자 그는 며칠 전 다시 북측에 비핵화를 채근했다. "베트남의 기적은 당신(김정은)의 기적이 될 수 있다"며…. 미국과 외교 정상화로 번영을 일군 '베트남 모델'이란 유인책을 제시한 셈이다.

하지만 북한에 베트남 식 개혁·개방을 권한 건 번지수를 잘못 짚은 느낌이다. 미국 육사인 웨스트포인트를 수석졸업한 그다. 하지만 북한 권부의 속사정에 밝은 탈북자 출신 기자의 분석이 더 명석해 보인다. 김일성대를 나온 주성하 기자는 최근 칼럼에서 "베트남은 1979년 '신경제정책'을 발표한 뒤 1986년 '도이머이(쇄신) 정책'을 내놓기까지 4차례나 공산당 지도부가 바뀌었다"고 지적했다. 즉 전임 지도부에 실책과 무능의 책임을 물은 뒤 개혁·개방 노선을 확정했다는 것이다.

반면 북한은 무오류의 존재로 우상화된 수령이 대를 이어온 세습체제다. 더욱이 무력통일 이후에 개혁·개방을 시도한 베트남과 달리 북조선엔 남한의 존재 자체가 체제 위협요인이다. 주민에겐 '더 잘사는 남조선'만 한 비교대상도 없어서다. 베트남 모델은 애초에 어불성설이란 뜻이다. 김 위원장의 처지에선 베트남·중국 식 모델보다 '싱가포르 모델'이 외려 솔깃할 법하다. 싱가포르는 리콴유·리셴룽 부자가 사실상 일당체제로 수십년 장기집권하면서 세계적 강소국으로 발돋움했다는 점에서다.

김정은도 북·미 정상회담 전야 "싱가포르의 훌륭한 지식과 경험을 배우려 한다"고 했었다. 그러나 그가 구경한 화려한 야경 너머로 싱가포르 모델의 본질까지 들여다봤는지는 의문이다. 싱가포르가 세계적 금융·물류 허브로 발돋움한 원동력은 중국·베트남보다 훨씬 투명한 경제시스템이 아닌가. 외부정보 차단이나 주민이동 금지 등 북한판 적폐를 청산하지 않고는 언감생심이다. 태영호 전 영국 주재 북한공사가 북한은 '개성공단 식 단절 모델'에 집착할 것으로 점친 근거다.


하지만 개성공단을 몇 개 더 만든다고 북한 경제가 살아날 수 있을까. 핵문제가 풀리지 않은 터에 글로벌 표준과도 거리가 먼 경제특구에 어느 서방기업이 진출하겠나. '대동강의 기적'을 일구려면 김 위원장이 핵 보유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개혁·개방 울렁증'에서 벗어나는 것 이외에 대안은 없다고 봐야 한다. 그가 이 길을 택할지도, 이후의 과정이 순탄할지도 현재로선 불확실하다. 분명한 건 그래야만 비로소 남북이 진정한 평화공존이란 종착역에 도달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kby777@fnnews.com 구본영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