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석록 칼럼]

이름 걸고 혁신성장 주도하라

재벌 3세, 4세 총수들이 당당하게 이름 석자 걸고 도전하는 모습 보여주길

'집념과 도전의 역사 100년'. 지난 2003년 산업부 현장기자일 때 동료들과 함께 연재한 '新온고지신' 시리즈를 묶어 이듬해 펴낸 책이다. 삼성, 현대 등 한국을 대표하는 9대 그룹의 태동과 성장사를 담았다.

거실 책장에 먼지가 쌓여 있던 책을 꺼내 뒤적거렸다. 쌀집 점원에서 세계 최대의 조선소와 자동차왕국을 일군 정주영 현대 회장, 국수가게로 출발해 오늘날 세계 최고의 정보기술(IT)사인 삼성전자를 탄생시킨 이병철 삼성 회장, 작은 포목점으로 시작해 세계인들이 가장 갖고 싶어하는 가전제품을 만들고 있는 LG전자의 초석을 닦은 구인회 LG 회장 등등. 자원은커녕 6·25전쟁으로 폐허나 다름없던 땅에서 어떻게 그 짧은 기간에 대기업으로 키웠을까 새삼 경이롭기까지 하다. 지금 그들 대신 손주들이 총수다. 이재용, 정의선, 구광모 등등.

연초에 만난 청와대 핵심 관계자는 "최태원 회장이나 정의선 부회장 등 젊은 오너들은 대화가 통한다. 재계가 좀 더 젊어졌으면 좋겠다"라는 말을 했다. "대화가 통한다?" 그때는 그 뜻을 정확히 몰랐다, 대화가 통한다니. 나이가 많은 아버지들과 달리 또래이거나 비슷한 세대이기 때문인가, 아니면 진보 정부의 정책을 이해하고 구세대인 아버지와는 다른 경영관이나 리더십?

그런데 그 답을 엉뚱하게 김상조 공정거래위원장이 알려줬다. 정의선 부회장은 현대차의 지배구조개편안이 주주 반대에 부딪혔을 때 "주주와 시장의 신뢰와 지지를 받지 못한 개편안을 보완하겠다"는 보도자료를 본인 명의로 배포했다. 김 위원장은 오너가 자신의 이름을 내걸고 당당히 나선 것에 과거 세대와는 다른 변화라고 언론 인터뷰에서 밝혔다. 그리고 이재용, 최태원 등 대기업 오너들이 자신의 이름을 걸고 변화를 주도해달라고 주문했다.

내가 가진 궁금증의 해답은 젊은 패기였다. 뒤로 숨지 않고 당당하게 전면에 나서 부딪치는 모습에 반한 것이다. 기업의 사회적 가치를 강조하는 SK 최태원 회장을 보면서 지키려는 아버지 세대와 달리 새 시대를 만들려는 정부와 손을 잡고 난관을 헤쳐나갈 수 있다고 본 것이다.

내가 기업인이라도 지금 경영환경은 겁이 난다. 주 52시간 근무, 최저임금제 도입. 또 미·중 무역전쟁은 얼마나 큰 쓰나미를 일으킬지. 아직 끝나지 않은 적폐청산과 총수들을 옥죄는 재벌개혁, 급변하는 남북정세 등. 이뿐만 아니다. 재벌가의 갑질에 대한 국민들의 분노, 대기업 하면 횡포를 떠올리는 반기업정서까지.

김상조 위원장의 주문이 아니더라도 손주 회장들은 시대적 요청을 받고 있다. 장하준 영국 케임브리지대 교수는 한 강연에서 "한국 경제는 혁신도 없고 투자도 없다"면서 "기업지배구조는 정답이 없고, 목표는 기업이 혁신과 사업다각화, 신산업 진출을 통해 일자리를 만드는 것"이라고 정부를 비판했다. 기업도 뜨끔하지 않을 수 없다. 일자리 없어 희망을 포기하고 사는 청년백수 100만명 시대. 정부에 코드를 맞추기 이전에 일자리는 기업의 사회적 책임이다.

정주영 회장은 이런 말을 했다. "내가 살아 있는 한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
" 젊은 오너들의 도전은 젊은이들에게 귀감이다. '집념과 도전의 역사 100년'의 추천사를 써준 현명관 당시 전국경제인연합회 상근부회장은 "기업인들의 활약을 소개하는 증보판을 계속해서 내달라"고 주문했다. 후배들이 쓸 증보판의 주인공은 젊은 회장님들이다.

cha1046@fnnews.com 차석록 수석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