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중로]

소서팔사와 소확행

에어컨이 없던 시절에는 어떻게 여름을 났을까요. 다산 정약용은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라는 이름의 책에 여름 더위를 피하는 법에 관한 시 한 수를 남겼습니다. 이름하여 '소서팔사(消暑八事)', 더위를 물리치는 여덟 가지 멋진 일입니다.

먼저 달 밝은 밤 개울에서 발 씻기. 시원한 물에 발을 담그는 '탁족(濯足)'은 한여름에도 단정한 복장을 갖추는 것을 미덕으로 알았던 조선 선비들의 대표 피서법입니다.

여러 문헌이 전하는 바에 따르면 한양에 살던 양반들은 남산이나 북한산 일대 계곡에서 탁족을 즐겼던 것으로 전해집니다. 특히 음력 6월 보름날인 유두(流頭)에는 흐르는 물에 머리를 감고 온몸에 찬물을 끼얹으며 더위를 식혔다고 합니다.

다산의 피서법은 대개 일상에서 찾을 수 있는 소소한 즐거움과 깊은 연관이 있는 듯합니다. 숲속에서 매미 소리 듣기, 연못에서 연꽃 구경하기, 빈 누각에서 투호놀이 등이 그렇습니다.

또 대자리 깔고 바둑 두기, 비 오는 날 시 짓기처럼 지극히 양반다운 취미활동이 있는가 하면 솔밭에서 활쏘기, 느티나무 아래서 그네 타기처럼 조금은 '액티비티'한 놀이도 포함돼 있습니다.

요즘 감각에 딱 들어맞는다고 볼 순 없지만, 요컨대 일상에서 찾을 수 있는 작지만 확실한 즐거움(행복)으로 여름 더위를 이겨내자는 제안으로 읽힙니다.

작지만 확실한 행복, 요즘 유행하는 말로 '소확행(小確幸)'이라는 이 낯선 용어를 처음 쓴 사람은 일본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입니다.

그는 1986년 펴낸 에세이집 '랑겔한스 섬의 오후'에서 이 말을 처음 언급하면서 다음과 같은 것들을 예로 들었습니다.

"갓 구운 빵을 손으로 찢어 먹는 것, 서랍 안에 반듯하게 접어넣은 속옷이 잔뜩 쌓여 있는 것, 새로 산 정결한 면 냄새가 풍기는 하얀 셔츠를 머리에서부터 뒤집어쓸 때의 기분 역시 소확행의 하나다."

하루키의 생각처럼 어떤 이에게는 아무것도 아닌 아주 사소한 것들이 누군가에는 큰 행복으로 다가갈 수도 있는 법입니다.

다산처럼 혹은 하루키처럼 일상을 마주하면서도 더위를 이겨낼 수 있는 방법은 제법 많습니다.

휴가철 도심의 호텔에서 하루 종일 아무것도 하지 않는 '호캉스'도 좋고, 편안한 집에서 여유롭게 오수(午睡)를 즐기는 '홈캉스'도 나쁘지 않습니다.


작열하던 태양이 숨을 죽이는 초저녁, 산책하기 좋은 길을 찾아 내가 애정하는 음악을 실컷 들으며 걷는 것도 더위를 잊는 방법이 될 수 있고, 가슴을 울리는 멋진 문장들로 가득한 책을 밤새도록 읽으며 하루를 보내는 것도 좋은 피서법입니다. 이열치열, 태양과 맞서 서핑을 즐기거나 배낭을 둘러메고 높은 산을 오르는 역발상도 더위와 싸우는 방법이 될 수 있습니다.

결국 중요한 것은 장소나 방법이 아니라 마음의 문제이며, 그것이 얼마나 나를 즐겁고 행복하게 해주느냐가 더 중요한 셈입니다.

jsm64@fnnews.com 정순민 문화스포츠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