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n논단]

오만과 편견


영국에 오만(傲慢, Hubris)을 연구하는 학회가 있다는 걸 얼마 전에야 알았다.

그 전문가가 서울에 와서 강연을 했다. 그에 따르면 동서고금을 통해서 수많은 지도자와 국가가 '오만'으로 인해 몰락했다.

"오만한 자는 자신을 과대평가, 무모한 결정을 내린다. 오만한 자는 자신의 권력과 성공에 취해 지나친 자신감과 야망에 사로잡혀 비판과 충고를 무시한다. 그 결과는 몰락이다."

오만 연구는 주로 정치인에 대해 행해지다가 요즘엔 경영자로 범위를 넓히고 있다고 한다. 제발 한국의 정치인과 경영인들에게 전공 필수과목이 되었으면 좋겠다. 어디 정치, 경제계뿐이랴. 내가 속했던 언론계, 방송계에도 오만은 차고 넘친다.

나는 언론이 통폐합된 1981년 방송사에 입사했다. 당시 KBS는 TBC를 흡수 통합했고, 양쪽 출신들은 물과 기름처럼 따로 놀았다. TBC 출신 PD들은 T 배우만 캐스팅했고, K 출신들은 K 배우만 캐스팅했다. 일촉즉발의 긴장이 흐르다가 마침내 '오만' 때문에 사건이 터졌다. TBC를 대표하는 최고 탤런트와 KBS 출신 후배 연출자가 스튜디오에서 충돌했다. 모든 PD들에게 소집령이 떨어졌고, 회의장에선 "감히 배우가 감독에게 대드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다"며 "본때를 보여야 한다"는 아우성이 빗발쳤다. 그는 평소에도 인기만 믿고 '오만'하기 짝이 없는 데다가 평양 출신이라 박치기를 잘해 안하무인이라고들 했다.

신입 PD인 나는 그와 얼굴 한번 마주친 적 없고, 사건의 자초지종도 몰랐지만 감히 PD에게 대들었다는 소리에 흥분해 맞장구를 쳤다. 그날 이후 오만한 스타는 1년 넘게 드라마에서 사라졌고, 나는 대단히 통쾌했다.

하지만 1년 후 불행한 상황이 벌어지고 말았다. TBC 출신 선배 PD가 그를 주연으로 캐스팅했고, 내가 조연출로 배정됐다. 아버지뻘 되는 그는 듣던 대로 셌다. 연습 때는 가장 먼저 나와 감독 옆자리에 앉았고, 후배 탤런트들이 지각이라도 하면 감독에 앞서서 나무랐다. 8개월 연속극을 끝내며 나는 결심했다. "감독으로 데뷔를 하면 꼭 캐스팅하리라."

그를 캐스팅한 건 10년이 흐른 후다. 독일 출신 이참과 하유미씨가 주연을 한 주말극 '딸부자집'에서 그는 다섯 딸의 아버지 역을 맡았다. 어느 날 대본 연습 중에 그가 할 대사 한마디가 마음에 들지 않아 수정하라고 지적했다. 그 순간 옆에 앉았던 그가 대본을 내 쪽으로 쑥 내밀었다. 자신도 집에서 연습할 때 입에 잘 붙지 않았는지 이미 그 대사를 연필로 슬쩍 고쳐놓은 게 보였다. 왜 연필로 써놓았느냐고 물었더니 "감독 동의를 얻어야 정식으로 고치지"라며 그때서야 볼펜으로 그 부분을 수정했다.

그게 그의 진짜 모습이었다.
그는 직분과 원칙에 너무 철두철미해 오히려 사람들이 두려워했고, 진정한 자긍심으로 무장해 오만하다는 편견을 얻었다. 그는 프로 방송인이었고, 투철한 장인이었다.

돌이켜보면 진짜 오만했던 건 자신의 지위를 과대평가하고 권위에 취해 있던 그 시절 나, 그리고 내가 속했던 집단 아니었을까?

이 글을 쓰면서 지금은 LA에 살고 계신 선생께도 편지를 드린다.

존경하는 김세윤 선생님, 여전히 건강하시겠지요!

이응진 한국드라마연구소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