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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리포트]터키의 시계는 거꾸로 간다

박종원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18.08.03 17:18

수정 2018.08.03 17:18

[월드리포트]터키의 시계는 거꾸로 간다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에서 터키계 무슬림을 대표하는 바키르 이제트베고비치 대통령 위원은 지난 5월 선거를 한 달 앞둔 터키 대통령이 사라예보에 도착하자 이렇게 외쳤다. "오늘날 터키 국가는 신께서 보내주신 한 사람을 받았다. 그는 바로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이다!"

15년간 터키를 지배했고, 앞으로 15년간 터키를 지배할 수 있게 된 에르도안 대통령은 해외 동포들에게 '신의 사자'로 불렸다. 집권 기간 약 200명의 언론인을 감옥에 보내고, 2016년 비상사태 이후 군경 등 16만명을 공직에서 축출한 그는 여전히 터키인들에게 신앙에 가까운 존재로 남아있다.

그렇다면 터키인들은 수많은 서방 국가에서 독재자로 불리는 그를 왜 이토록 사랑하는 것인가. 그 대답을 찾으려면 터키 역사를 돌아봐야 한다.

터키에서 국부로 불리는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는 1922년 술탄을 쫓아내고 오스만제국을 멸망시킨 뒤 이듬해 터키공화국을 건국했다.
그리스와 치열한 독립전쟁 끝에 탄생한 공화국은 사실상 아타튀르크와 그가 이끄는 군대에 의해 세워졌다. 아타튀르크는 이후 부패한 이슬람 신정정치가 제국을 몰락시켰다고 보고 철저한 정교분리를 표방하는 세속주의 정권을 세웠다. 그는 아랍 문자를 버리고 민주주의를 비롯한 서구 제도를 도입하는 등 낯선 개혁을 펼쳤다. 이때 함께 건국에 참여한 군부는 세속주의의 수호자로 의회와 정부 위에 군림하며 끊임없이 정치에 개입했다.

그러나 터키는 본질적으로 이슬람 국가였다. 비록 지도부가 서구 사회를 지향하긴 했지만 도시를 제외한 교외의 농민들은 여전히 매우 보수적이고 독실한 무슬림들이었다. 2014년 설문조사에서 터키 응답자의 11.3%는 이슬람 극단조직 '이슬람국가(IS)'가 테러조직이 아니라고 답했다. 농촌의 무슬림들은 건국 이래 끊임없이 이슬람 질서 회복을 요구했지만 이스탄불의 자본가와 손잡고 '세속주의 엘리트'를 형성한 군부는 이들을 끊임없이 탄압했다. 군부는 1960년에 첫 번째 쿠데타를 일으켜 친이슬람 정책을 폈던 아드난 멘데레스 총리를 처형했다. 이후 1997년에는 이슬람계 복지당 정부를 정교분리 위반을 구실로 뒤엎기도 했다.

아울러 터키의 세속주의 엘리트들은 경제적으로도 실책을 거듭했다. 건국 이후 80여년 동안 터키 정부의 평균수명은 잦은 쿠데타와 불안한 연정으로 에르도안이 집권한 2003년 전까지 2년에도 미치지 못했다. 터키는 에르도안 집권 전인 2002년에 국제통화기금(IMF)의 구제금융을 받는 처지에 놓였다. 지난해 터키 국민들의 평균 학업기간은 6.51년에 그쳤으며 대졸자 비율도 전체 성인 중 16%에 불과했다. 반면 이슬람 성직자를 꿈꾸는 학생 숫자는 2002년 6만명에서 2014년에 120만명으로 늘었다.

에르도안의 부상은 이러한 터키 사회의 균열을 보여주는 극명한 예다. 복지당 출신으로 이스탄불 시장을 지냈던 그는 이슬람주의를 표방하는 정의개발당을 창당, 2002년 총선에서 압승을 거둬 국민이 그토록 열망하던 안정적인 정부를 꾸렸다. 에르도안은 동시에 무슬림이자 도시빈민과 농촌의 대변자를 자칭하며 대대적인 인프라 개발과 해외투자 유치에 나섰다. 터키의 명목 국내총생산은 2002년 2380억달러에서 2016년에는 8640억달러(약 975조원)로 늘었다. 에르도안은 적어도 지지자들에게만큼은 독재자가 아닌 부패하고 불안한 서구 제도를 밀어내고 오스만제국 시절의 질서를 되살리는 경건한 무슬림 개혁가로 자리 잡았다.

다만 그의 치세가 과연 15년간 더 이어질지는 미지수다. 에르도안을 정상에 올려줬던 경제적 성과가 무너지고 있기 때문이다. 터키리라 가치는 정부의 지나친 환율개입과 미국의 제재로 인해 곤두박질치고 있으며 지난 6월 물가상승률은 15.39%로 2003년 10월 이래 가장 높았다.
해외 전문가들은 터키가 다시 IMF 구제금융을 신청할 수 있다고 점치고 있다. 15년간 터키의 시계를 거꾸로 돌렸던 에르도안은 자신의 성과 또한 거꾸로 돌아가는 처지에 놓였다.
터키의 시간이 앞으로 어느 쪽으로 흐를지는 이제 터키 국민에게 달렸다.

pjw@fnnews.com 박종원 국제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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