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림길에 선 사우디 “증산해? 말아?”

자카르타의 유령: 사우디 산유량 추이(하루 백만배럴) 적색점선은 7월 계획 /사진=JODI, OPEC, 블룸버그

사우디아라비아가 중대한 갈림길에 섰다. 이란에 대한 미국의 석유금수 조처, 베네수엘라 석유생산 위축 등 시장을 뒤흔들 불안 요인에 대비해 증산하겠다고 약속은 해 놨지만 터키 위기가 터지면서 유가가 하락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칫 위기가 신흥시장으로 확산되면 급격한 석유 수요 둔화를 불러 1997년 태국을 시작으로 한국, 러시아, 브라질 등을 강타한 신흥시장 외환위기 당시 같은 최악의 사태를 재연할 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사우디를 좌불안석으로 만들고 있다.

이달말 사우디, 러시아 등 감산참여국 일부 석유장관들이 사상 처음으로 전화회의를 통해 시장 상황을 관찰할 예정이지만 증산 약속을 지킬지 여부를 장담하기 어렵게 됐다.

19일(현지시간) 블룸버그통신에 따르면 사우디는 터키 위기가 1997년 아시아 외환위기의 재판이 될 가능성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산유량 조절에 나서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1997년 사우디는 사상최악의 오판을 내린 적이 있기 때문이다.

1997년 11월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에서 열린 석유수출국기구(OPEC) 각료회의에서 사우디는 OPEC 동료 회원국들을 설득해 증산 결정을 이끌어냈다. 당시 신흥시장에 불어닥치고 있던 외환위기 조짐은 무시했다.

그러나 일시적인 현상에 그칠 것으로 보였던 태국의 외환위기는 걷잡을 수 없이 확산돼 1998년 중반에는 러시아와 브라질까지 위기로 치달았고, 세계 석유 수요는 급격히 둔화됐다. 유가는 폭락해 국제유가가 배럴당 10달러 선까지 무너졌다.

사우디와 OPEC은 신흥시장이 다시 어려움을 겪으면서 최근 증산 결정이 당시 상황을 재연하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를 갖기 시작했다. 증산 결정이 이른바 ‘자카르타의 유령’을 다시 불러낼 가능성을 우려하고 있다. 1997년과는 비교하기 힘들 정도로 경제 상황은 아직 양호하지만 터키부터 중국까지 경기둔화세가 뚜렷해 안심하기 어려운 탓이다.

옥스퍼드에너지연구소(OIES)의 바삼 파투 소장은 “위험 균형추는 확실히 세계 경기 둔화가 유가에 미칠 여파가 공급 충격에 비해 훨씬 더 클 것임을 가리키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 때문에 사우디, 러시아 등 OPEC, 비 OPEC 감산참여국 석유장관 일부가 이달말 사상최초로 전화회의를 통해 공동각료 모니터링위원회를 열게 된다.

국제유가 기준물인 브렌트유는 5월 중순 배럴당 80.50달러를 찍은 뒤 지금은 13% 가까이 하락한 70.30달러로 떨어졌다. 중국의 수요 둔화, 사우디와 러시아 등의 증산, 무역전쟁이 세계 경제를 둔화시키고 이에 따라 석유수요도 격감할 것이란 우려가 작용한 탓이다.

여기에 터키발 신흥시장 불안까지 가세했다.

소식통들은 6월 산유량을 늘렸다가 7월 들어 다시 산유량을 줄인 사우디의 갈지자 행보는 이 같은 우려를 반영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사우디는 OPEC에 산유량이 6월에는 하루 1050만배럴, 지난달에는 1035만배럴을 기록했다고 밝힌 바 있다.

사우디가 선뜻 감산을 지속하기도 어렵다.

경제전망이 20년전 외환위기 당시와는 비교하기 어려울 정도로 양호한데다 연간 석유수요 증가율 역시 여전히 10년 평균치를 웃돌고 있다. 게다가 석유소비 강세를 예고하는 정유마진도 탄탄하다.

국제통화기금(IMF), 국제에너지기구(IEA)의 경제전망, 석유수요 전망도 이전보다는 낮아졌지만 비관적이지는 않다.

다만 이들 전망에는 아직 터키 위기가 반영돼 있지 않다는 것이 걸림돌이다.
터키 위기가 신흥시장으로 확산돼 신흥시장 통화 가치가 큰 폭으로 깎인 상태이고, 향후 전망도 가늠하기 어려워 이들의 전망이 얼마나 비관으로 흐를지 아직 알 수 없다.

컬럼비아대 글로벌에너지정책연구소(CGEP)의 제이슨 보도프 소장은 “늘 예측하기 힘든 석유시장 기준으로도 향후 전망은 매우 불확실하다”고 지적했다.

그는 이란 석유금수가 현실화하고, 사우디가 증산하면 생산여력이 빠듯해져 유가 상승을 억제하기 어렵게 되지만 사우디가 “무역전쟁 우려로 증산을 하고, 신흥시장의 석유수요가 둔화하면 아시아 외환위기 직전 OPEC이 증산에 나섰던 1990년대말에 그랬던 것처럼 유가가 붕괴할 수 있다”면서 “(사우디가) 매우 어려운 결정에 직면했다”고 말했다.

dympna@fnnews.com 송경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