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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중로] 무지의 장막

김태경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18.09.03 16:40

수정 2018.09.03 16:40

[윤중로] 무지의 장막


20세기 가장 중요한 정치철학서인 존 롤스의 정의론은 정의를 사회제도가 추구해야 할 첫번째 덕목으로 주저없이 꼽는다. 그러나 그는 정의의 개념에 공평이라는 가치를 최우선순위에 올려 놓았다. 시장이라는 공간에서 공평한 정의가 실현되기 위해서는 '무지의장막'이 필요하다는 판단에서다. 왜 그럴까. 우리가 원초적 환경이라는 무지의 장막에 들어서는 순간 우리를 규정하는 모든 사회적 환경과 지위, 사회적 부 등이 가려져 공평한 환경이 조성되기 때문이다. 이게 정의라고 그는 생각했다.

최근 김병준 자유한국당 비대위원장이 촉발한 국가주의의 논쟁은 다시금 정의의 문제를 떠올리게 한다.
여기서 인출되는 현상은 자유주의가 신봉하는 자유와 사회주의가 강조하는 평등 간의 오래된 대립구도다. 우파는 자유주의에 가깝고, 좌파의 핵심 가치는 평등이라는 것 말이다. 전통적으로 우파는 개인의 권리를 보장하는 작은 정부를, 좌파는 부의 재분배 등 평등을 추구하는 국가주의 성향이 강하다는 인식이 지배적이다. 그러나 이런 인식은 전제가 잘못됐다. 자유와 평등을 서로 화해할 수 없는 가치로 전한시켜 자유의 확대에 따른 불평등 구조를 암묵적으로 용인하는 왜곡된 결과를 초래해서다.

'미국의 민주주의'를 쓴 알렉시 드 토크빌은 "민주사회의 발전을 이끄는 가장 중요한 역량은 평등의 원칙"이라고 서슴없이 말했다. 평등의 가치가 훼손되면 자유주의는 자유가 아닌 방종으로 타락한다는 의미다. 그만큼 자유와 평등은 서로를 배제하는 것이 아닌 상호보완적 개념이라는 것이 저 유명한 자유주의자의 일갈이다. 평등을 '획일화'라는 잘못된 렌즈로 들여다본 결과다.

자유주의는 원래 개인의 자유의 권리를 적극 옹호한다. 그 밑바탕에는 자유를 실현하기 위한 다양한 제도적 장치와 이에 따르는 권리와 의무가 강조된다. 모든 자유는 국가가 마련하는 제도와 사회규범, 도덕적 신념 없이는 성립하기 어렵다는 점에서 국가의 틀을 벗어나기 어렵다. 이런 점에서 시장의 자유는 사회공동체의 도덕적 가치를 위반하면서까지 절대적 자유를 누리는 게 아니다. 시장은 사회 전체 기본제도의 일부에 불과하다. 시장이 선이고 모든 것이라는 우파의 사고가 자유주의의 정설로 굳어진 건 미국의 자유주의 철학자 로버트 노직이 내세운 자유방임주의를 무차별적으로 수용한 결과다. 시장에서 모든 사람은 자유롭고 평등하게 계약을 맺기 때문에 불평등한 결과를 받아들이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이 그의 입장이다. 국가의 개입과 규제를 극도로 꺼리는 왜곡된 자유주의자들이 탄생한 배경의 전말은 이렇다.


그러나 존 롤스가 강조했던 무지의장막을 상기하면 시장에서의 공정은 애초에 성립하기 어려운 명제다. 토크빌은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삶의 실질적 불평등을 마주하면서도 평등하다는 상상 속에서 살아간다고 역설했다.
신이 일찌감치 행복의 양탄자를 깔아준 이유는 어느 순간 확 잡아당겨 넘어뜨리기 위해서라는 사실을 일찍 깨달아야 했다.

ktitk@fnnews.com 김태경 정책사회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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