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장칼럼]

강대국의 불손함과 외교현실

지난해 6월 워싱턴으로 향하는 대통령전용기 안 공기는 긴장과 기대가 가득했다. 새 정부 출범 후 불과 50일밖에 안된 시점에서 첫 한·미 정상 상견례를 위한 비행이었다. 새 대통령은 13시간여 비행 내내 미국에서 처음 행할 연설문을 뜯어고치느라 여념이 없었다.

당시 문재인정부 청와대에선 "북한부터 가야 한다"는 주장과 "미국부터 가야 한다"는 입장이 팽팽히 맞섰다. 대부분 김대중·노무현정부 때 외교안보팀을 구성했던 원로들은 이명박·박근혜정부 9년간 단절된 대북라인을 연결하기 위해서라도 평양부터 방문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반면 임종석 대통령비서실장·정의용 국가안보실장 등 새 참모진들은 워싱턴부터 가야 한다고 판단했다. 특히 임 실장은 평양으로 향하던 항로를 워싱턴으로 돌리게 한 결정적 역할을 했다는 후문이다. 임 실장은 최근 "냉엄한 외교현실의 세계에서 미국의 전략적 인내와 동의 없이 시대사적 전환을 이룬다는 건 사실상 가능하지 않다"고 밝혀 1년 반 전, 서둘러 미국부터 방문하게 된 배경을 가늠케 했다. 냉전시대 동방정책을 추구했던 빌리 브란트 전 서독 총리와 그의 참모 에곤 바르처럼 문 대통령과 임 실장은 미국과의 신뢰관계 구축에 상당한 공을 들였다.

긴장 속에 이뤄진 첫 방미는 마치 빗맞은 화살 같았다. 문 대통령의 정공법은 트럼프의 변화구에 속수무책이었다. 트럼프는 문 대통령을 바로 옆에 세워놓고 공동선언에 있지도 않은 한·미 통상 문제를 언급하느라 대부분의 시간을 할애했다. 2017년 6월 초여름 백악관 로즈가든의 햇살은 따갑고 건조하기 그지 없었다.
두번째 방미와 세번째 방미는 각각 그해 9월 뉴욕과 이듬해인 올해 5월 워싱턴DC에서 이뤄졌다. 특히 올해 5월 세번째 방미는 트럼프의 변화구가 최고조에 달했다. 트럼프는 북·미 정상회담을 성사시키고자 날아온 문 대통령을 앞에 두고, 회담 무산 발언을 내놓았으며 이 장면은 미 전역에 생중계됐다. 왕복 비행시간은 약 30시간, 미국 체류시간은 단 24시간30분에 불과했다. 미국에서의 세 번의 변칙적인 정상회담 끝에 트럼프는 지난 9월 말 뉴욕회담에서 더 이상 변화구를 쓰지 않았다. 1년 6개월 만이다.

에곤 바르는 브란트 총리가 그토록 미국에 공을 들였음에도 이런 시각을 가졌다고 소개했다. "유럽인인 브란트에게 미국은 낯설었고 집처럼 편안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여전히 다른 어느 나라와도 대체할 수 없는 존재가 바로 미국이다.
" 강대국 미국이 약소국을 대하는 '전형적인 불손함'과 '현실정치'의 어쩔 수 없음을 지적한 것이다. 브란트의 궤적이 문 대통령의 '가보지 않은 길'과 오버랩된다. 문 대통령의 '공든 탑'은 앞으로도 끊임없이 시험당할 것이다.

ehcho@fnnews.com 조은효 정치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