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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n논단]내가 살고 싶은 동네

안삼수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18.10.03 16:40

수정 2018.10.03 16:40

[fn논단]내가 살고 싶은 동네


내가 살고 싶은 곳은 강남이 아니다. 내가 살고 싶은 곳은 강북도 아니다. 최근 집값 때문에 벌어진 난리 법석을 보면서 '살고 싶은 동네'를 상상해 봤다.

내게는 한살 아래 외사촌 동생이 있다. 그는 20대 초반에 어찌어찌 저 스위스 취리히로 이민을 갔다. 그의 타국 생활 15년쯤 되던 1990년, 스위스에 갈 일이 생겨 그를 만났다.
영세중립국, 알프스로 상징되는 스위스에 사는 아우가 한없이 부러웠다. 그는 세계적인 회사에 다녔고, 간호사 아내에 아들과 딸을 둔 행복한 가장이었다. 20년 만에 만나 회포를 풀던 중에 아우가 불쑥 내게 물었다.

"형, 서울 아파트 값이 1억이 넘는다며, 그게 정말이야?" "그럼, 내가 사는 쪼그만 것도 1억이 훨씬 넘을 걸."

갑자기 아우가 울기 시작했다.

"형! 나 이제 서울로 못 돌아가겠네. 아파트 값이 1억이 넘는다니 이제 영원히 못 돌아가겠네."

황당했다. 멋진 융플라우산도, 자유롭고 평화로워 보이는 유럽 생활도 그의 향수를 잠재우진 못한 모양이다.

나는 아우가 진정되기를 기다렸다가 그곳의 삶에 대해서 이것저것 물어봤다. 취리히는 이사를 가려면 그 동네 주민들에게 허락을 받아야 된다고 한다.

현재 살고 있는 동네 사람들의 평(評)과 가족들의 신상명세서를 보내면 주민들이 그걸 본 후 찬반투표를 한다고 했다. 이웃 사람들 평에는 이 동네 살면서 술 취해 전봇대에 방뇨한 적은 없는지, 자동차로 동네를 질주하거나 빵빵 크락슨 울린 적은 없는지, 층간소음으로 다툰 적은 없는지 온갖 행동거지를 기록하는 모양이다.

하지만 혹독한 심사와 황당한 텃세를 통과해 일단 한 동네 사람이 되면 그 다음 날부턴 180도로 달라진다고 한다.

혹시 이사 온 집 아이가 시내에서 불량배들에게 해코지 당하는 모습을 보면 당장에 달려가 막으며 자기 조카라며 난리를 치고 정말 친척처럼, 이웃사촌처럼 살아간다고 했다.

무수한 전쟁을 겪어 영세중립을 선언한 스위스인들. 그들은 그 참혹한 전쟁을 통해서 자신이 이웃을 지켜줄 때 이웃도 자기 가족의 평화와 행복을 지켜준 역사의 가르침을 잊지 않은 듯했다.

이웃이 있어야 자신이 존재할 수도 있다는 그들의 세계관을 시간이 한참 흐른 지금에야 깨닫는다.

나는 지금 한 동네에서 20년 넘게 살고 있지만 인사를 나누는 동네 주민은 채 열사람도 안 된다.
아파트 같은 열에 누가 사는지, 아래층 사람의 직업도, 위층 사람의 취미도 모른다. 이사 허락이나 이사 떡은 안 돌리더라도 새로 이사 온 가족의 신상명세서는 돌리는 동네, 이웃집 숟가락이 몇 개인지 모르지만 직업과 취미는 아는 동네, 살아가면서 이웃사촌이 되는 그런 동네에 살고 싶다.
말 나온 김에 오늘 밤 아파트 엘리베이터에 우리 식구 신상명세서라도 붙여놓을까 보다.

이응진 한국드라마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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