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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리포트] 美 뒤흔든 ‘캐버노 스캔들’

파이낸셜뉴스

입력 2018.10.05 16:55

수정 2018.10.05 16:55

[월드리포트] 美 뒤흔든 ‘캐버노 스캔들’

한국 사법부가 지금 과거 정권 시절 자행된 사법농단으로 곤욕을 치르고 있다면 미국 사법부는 대법관 임명을 둘러싼 진실게임 소용돌이에 휘말려 있다. 논란의 당사자는 브렛 캐버노 현 워싱턴DC 연방 항소법원 판사.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7월 말 사퇴한 앤서니 케네디 전 대법관 후임으로 지명한 보수 성향의 판사다. 트럼프 대통령이 현재 진보 4, 보수 4의 구도로 갈려 있는 대법원의 이념지형을 확실한 보수 우위로 만들기 위해 선택한 회심의 카드다. 대법관 후보로는 상당히 젊은 53세인 그가 대법원에 입성할 경우 향후 20~30년간 보수진영에 유리한 판결들이 많이 내려질 것이라는 견해가 우세하다.

시쳇말로 완벽해 보이는 스펙의 소유자인 캐버노 판사가 상원의 인준을 무사히 통과해 연방 대법관의 영예로운 타이틀을 차지하게 될 것임을 의심하는 사람들은 얼마 전만 해도 많지 않았다. 민주당이 그의 보수적 성향을 우려해 결사반대하고 나섰지만 대법관 인준은 단순 과반수로 처리된다는 점에서 캐버노의 대법원 입성은 기정사실로 받아들여졌다.
상원은 현재 공화당이 51대 49로 다수당이다.

하지만 승승장구할 것만 같았던 캐버노 판사는 (본인은 부인하는) 30여년 전의 한 사건이 돌연 세상에 알려지면서 일생일대의 위기에 봉착했다. 크리스틴 블라지 포드라는 팰로앨토대 교수가 1982년 여름 그녀가 15세였을 때 당시 17세의 고등학생인 캐버노에게 강간 당할 뻔했다고 주장하고 나서면서 상황은 급변했다. 포드 교수의 주장을 뒷받침할 증거나 증인은 없지만 그녀의 증언이 너무나 구체적인 데다 최근 전 세계를 강타한 미투 운동의 영향으로 파장은 엄청났다. 캐버노의 예일대 재학 시절 성추문을 고발하는 또 다른 여성도 등장했다. 지난달 27일 상원 법사위원회에서 진행된 포드 교수와 캐버노의 증언은 기자도 지켜봤다. 포드는 대부분의 사람이라면 위축될 수밖에 없는 청문회장에서 30여년 전 일을 차분하면서 담담하게 사실 위주로 증언했다. 청문회가 열리기 전부터 그렇게 생각했지만 포드 교수가 과거에 없었던 일을 꾸며서 이야기한다는 느낌은 전혀 들지 않았다. 두 아들의 어머니이자 한 남자의 아내 그리고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대학 교수가 아무 이유 없이 자청해서 세상의 구설수에 오를 이유는 없다고 믿는다. 물론 캐버노 판사는 성폭력 혐의를 부인하고 결백을 호소했다.

청문회 이후 공개된 여론조사들은 캐버노 판사보다 포드 교수의 말을 신뢰한다는 사람이 많다는 것을 보여준다. 상원이 캐버노의 대법관 인준을 거부하거나 트럼프 대통령이 그의 대법관 지명을 철회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하지만 문제는 그리 간단치 않다. 1982년 발생한 사건의 진실을 밝혀줄 증거와 증인 없이 심증만으로 능력 있는 법관의 앞길을 막는 것은 법치주의 국가에서 있을 수 없다는 반론도 만만치 않다.

상원은 4일(현지시간) 캐버노의 성폭행 혐의를 조사한 연방수사국(FBI) 보고서 검토 작업을 벌였고 빠르면 6일 인준 투표를 실시할 것으로 전해졌다. 백악관은 보고서에서 그의 혐의를 입증할 내용은 발견하지 못했다고 밝혔다. 예상대로 심증은 가지만 물증은 없는 것 같다. 공화당 여성 의원이나 온건파 의원들이 캐버노의 인준에 반대표를 던질 가능성은 일부 배제할 수 없다. 반대로 캐버노의 혐의를 입증할 증거가 나오지 않는 한 대법원 구성을 공화당에 유리하게 만들기 위해 공화당 의원들이 모두 캐버노를 지지할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어떤 결과가 나오든 후유증은 클 수밖에 없다.
공정성과 신뢰를 바탕으로 이뤄져야 할 대법원 구성이 정치, 진영 논리의 연장선에서 결정됐다는 비난에서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이다. 월스트리트저널은 캐버노 인준 소동으로 미국의 여론이 양분돼 대법원의 정치적 양극화가 더 심화될 수 있다는 우려를 나타냈다.
신뢰의 상징인 대법원이 미국민들에게 정치적 집단으로 비친다면 정말 안타까운 일이다.

jdsmh@fnnews.com 장도선 워싱턴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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