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 산업일반

[차장칼럼] '덜 나쁜 선택'이 옳을때

안승현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18.10.10 15:52

수정 2018.10.10 15:52

어린시절 무협지를 무척 좋아했다. 친구들이 당시 한창 유행하던 국산 '판타지' 소설에 심취해 있을때도 난 무협지만 붙잡았다.

그 당시 동네마다 책대여점이 여기 저기에 많았다. 덕분에 한권에 몇백원만 내면 언제든 무협지를 빌려다 읽을수 있었으니, 그만큼 값싸고 쉽게 즐길수 있는 여가꺼리가 없었다.

칼끝에 목숨을 걸고 무와 협을 이야기하는 남자들의 이야기는 항상 가슴을 설레게 했다. 무협지속 무사들의 삶에서 가장 멋졌던 것은 승부에서 이기기 위해 팔 하나쯤은 과감히 희생하는 그들의 결단력이었다.


'이대도강'. 원래는 자두나무가 복숭아나무를 대신해 넘어진다는 뜻의 고사성이인데, 작은 손해를 보고 큰 승리를 거둔다는 것이다. 무협지속 무사들이 "살을 내어주고 뼈를 취한다"고 외치며, 살아남기 위해 오히려 쏟아지는 칼날 속으로 몸을 던지는 장면에서는 나도 모르게 장탄식을 내뱉고는 했다.

훗날 커서 사회에 나오고 난 뒤, 어른으로 현실에서 산다는 것 또한 무협지속 무사들 이상으로 살벌한 결정의 연속이라는걸 알게 됐다. 항상 최선의 선택만으로 삶의 궤적을 이어갈수 있다면 좋으련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우리는 가장 좋은 선택보다, 덜 나쁜 것을 골라야 하는 상황에 직면하는 경우가 더 많다.

삼성중공업이 최근 조선 3사 가운데 처음으로 올해 임금단체협상을 매듭지었다. 그것도 묵혀뒀던 2년치를 포함 총 3년치의 협상을 한번에 마무리지었다.

올 초 부터 노사 양측의 간극이 너무 커 추석이 다 되어서까지 합의가 안끝날 조짐이었는데, 일이 되려니 한번에 성사되기도 하나보다.

올 들어서 조선업 경기가 되살아나는것 같다는게 중론이다. 수주 소식도 자주 들리고, 한동안 중국에게 빼앗겼던 전세계 발주량 1위도 수개월째 한국이 차지 하고 있다.

조선업계 노사가 시끄러운것은 이때문이다. 아직 어려우니 임금을 반납하라는 사측과, 이제 수주도 들어온다는데, 임금을 올려야할때가 됐다는 노조측이 칼을 맞대고 있는 형국이다.

삼성중공업이 1년치도 아닌 3년치를 한번에 타결할수 있었던 것은, 이 험난한 칼싸움에서 각자 덜 나쁜 선택을 했기 때문이다. 삼성중공업의 노동자협의회는 임금인상에서 동결로 한발 물러나는 대신, 고용안정 약속을 받아냈다. 내일 월급이 올라도 모레 희망퇴직으로 회사를 나가면 무슨 소용이겠는가. 지금 받는 월급이라도 오래 지키자는 생각을 다들 했을 것이다.

현대중공업과, 대우조선해양은 아직 임단협으로 노사가 힘겨루기를 하고 있다. 돌아가는 분위기로 봐서 조선 빅3가 올해 모두 수주 목표치를 못채울 가능성이 있다.
언제 인력 구조조정을 하더라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라는 얘기다. 노조나 회사나 어느 한쪽만 이길수는 없는 싸움이다.
노조가 '덜 나쁜 선택'을 고를수 있는 시간도 얼마 안남았을지도 모른다.

ahnman@fnnews.com 안승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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