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구순의 느린 걸음]

정부의 '암호화폐 포비아'

"가만히 있으면 중간은 가잖아요. 괜히 암호화폐니 암호화폐공개(ICO)니 신산업 정책을 만들겠다고 나섰다 혹시 여론이 악화되기라도 하면 책임지라고 할 텐데…. 그냥 우리 부에서는 가만히 있다가 분위기 만들어지면 끼어볼 생각입니다." 최근 만난 한 정부부처 공무원의 말이다.

세계경제포럼(WEF)이 블록체인을 4차 산업혁명을 주도할 핵심기술로 선정하고, 암호화폐 열풍이 일반인까지 확산된 지 3년이 가까워온다. 일찌감치 암호화폐 사업에 나선 업비트, 빗썸, 코인원 같은 기업들은 세계의 주목을 받는 큰 기업이 됐다. 그 기업들이 세계시장을 공략하겠다는 명분으로 잇따라 해외로 나가고 있다. 네이버, 넥슨 같은 회사는 아예 한국에서는 암호화폐 사업을 할 생각이 없다며 해외사업만 한다. 말이 좋아 세계시장 공략이지 사실은 한국에서는 사업을 할 수 없으니 하지 않겠다는 분위기다.

재계 순위 10위 안에 드는 대기업들이 블록체인 사업부를 두고 사업기회를 찾아나선 지는 2년 가까이 됐다. 대형 은행들도 이미 글로벌 파트너들을 모아 암호화폐 사업을 모색 중이다. 그러나 누구도 대놓고 신사업을 홍보하지 못한다. 아는 사람들끼리 단출하게 모이는 자리에서 "정부 눈치보여 큰소리로 말은 못하지만 이번에 큰 계약을 한 건 했어요"라며 소심한 자랑을 하는 정도다. 사업을 본격적으로 하기 위해서는 해외에 별도법인을 차리겠다는 얘기도 뒤따른다.

기업들이 한국에서 짐을 싸고 신사업 성공을 감춰야 하는 불안한 시장이 지속되고 있지만 정부 안에서 암호화폐에 대해 진지한 정책검토를 하고 있다는 낌새는 아직 없다. 국무총리실이 다음달 범정부 정책을 내놓겠다고 하지만 관련부처 공무원들이 모여 블록체인 기술과 산업, 암호화폐의 원리, 전망과 국내 산업방향을 기본적으로 학습하고 진지하게 토론했다는 흔적은 찾을 수 없다. 암호화폐 산업을 책임지겠다고 나서는 부처도 없다.

사실 암호화폐는 문재인정부의 첫 공포대상이다. 대통령 지지율이 70%를 찍고 있던 올해 초 법무부의 암호화폐 거래소 폐쇄설이 나오자 지지율이 60%대로 주저앉는 반대여론을 경험한 것이다. 이후 정부에 '암호화폐 포비아'가 형성된 것 아닌가 싶다. 가만히 있어 중간만 하겠다는 생각이 뿌리를 내린 것 아닌가 싶다.

그런데 정부와 공무원이 진짜 책임져야 할 일이 무엇인지 진지하게 되짚을 때다. 정책방향을 제시하지 않아 급성장하는 신기술, 신산업을 한국에서 해보지도 못하게 손발을 묶어두는 것. 대한민국 청년들이 일하고 싶은 젊은 기업들을 해외로 쫓아낸 것이야말로 역사 앞에 책임져야 할 일 아닌가 말이다.


2년쯤 지난 어느 날 "정부는 블록체인.암호화폐 분야에서 선진국과 기술격차를 줄이고 산업을 활성화하기 위해 정부 예산을 3조원 지원하기로 했다"는 때늦은 보도자료를 내지 않으려면 지금 '가만히' 있으면 안된다. 남들이 모두 뛰고 있는 지금 우리만 가만히 있으면 중간 못간다. 망한다.

cafe9@fnnews.com 블록포스트 편집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