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본영 칼럼]

北 개혁 없는 평화는 신기루다

제재완화는 득보다 실 커
화려한 평화 이벤트보다 북 비핵화·개방이 급선무


평화 '담론'이 단풍보다 더 짙게 한반도의 가을을 물들이고 있다. 올 들어 4·27 판문점선언, 9·19평양선언 등 평화 이벤트가 숨 가쁘게 이어지면서다. 문재인 대통령이 23일 평양공동선언에 비준하면서 '평화 드라이브'는 절정에 이른 느낌이다.

그래서 평화의 시대가 활짝 열릴 것인가. 얼마 전 북한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남쪽 고위급 인사들과 백두산 천지에서 '손 하트'를 그렸다. 그런 그는 목함지뢰 테러와 수차례 핵실험을 감행한 장본인이다. 어느 쪽이 그의 본모습일지를 누가 확언하겠나.

다만 현 시점에서 남북 평화공존론이 상대적으로 현실성은 있어 보이긴 한다. 구호만의 통일지상주의, 특히 전임 박근혜정부의 '통일대박론'에 비해서다. 후자가 은연중 세습체제 붕괴를 염두에 두고 있다면 더욱 그렇다. 어느새 권력세습 7년차인 김정은이 당·정·군을 확실히 틀어쥐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으니 말이다.

그러나 북한 세습체제와의 공존은 평화의 필요조건이지 충분조건일 순 없다. 김 위원장이 선대 수령인 김일성·김정일과 다를 것이란 심증만 있지 물증은 적기 때문이다. 현재로서 분명한 건 평화는 김정은의 진정한 비핵화와 개혁·개방 의지에 달려 있다는 정도다. 그 연장선에 세 갈래 시나리오를 상정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첫째, 북한이 핵을 버리고 고르바초프식 개혁·개방을 선택하는 경우다. 남북 양쪽의 주민과 자본이 자유로이 오간다면 '사실상 통일'이나 다름없다. 우리로선 선택 가능한 차선일 게다. 다만 김 위원장에겐 옛 소련처럼 체제 동요를 감수해야 하는 모험이다.

둘째, 북한 체제의 부분적 개방도 있음 직하다. 김 위원장이 체제유지를 확신하지 못할 때의 옵션이다. 예컨대 '주민통제가 가능한 개성공단 모델'을 복수로 확장하는 방식이다. 그렇게 해서 비핵화가 완결되지 못한 가운데 대북지원 여부를 놓고 남남갈등만 이어진다면 '진짜 평화'는 요원해진다.

셋째, 김 위원장이 '핵 보유 개발독재' 모델을 지향할 때다. 만일 북이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포기를 미끼로 미국과 거래해 파키스탄처럼 사실상의 핵보유국임을 묵인받으려 한다면? 남한이 북핵의 인질이 되는 최악의 시나리오다.

그렇다면 평화에 대한 열정 못잖게 냉철한 판단이 긴요한 시점이다. 일찍이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은 "신들은 주사위를 던지지 않는다"고 했다. 요행을 바라지 말고 인과관계를 따져 예측해야 한다는 함의다. 이런 과학적 잣대로 보면 평화는 상대의 선의가 아니라 힘의 균형에 의해 보장될 뿐이다. 현실주의 국제정치학의 냉엄한 논리다.

어쩌면 지난주 유럽 순방에서 문 대통령도 이를 실감했을 듯싶다. 김정은을 믿고 "대북제재를 완화하자"는 문 대통령의 제안에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인 프랑스 마크롱 대통령은 고개를 가로젓지 않았나. 영국의 메이, 독일 메르켈 총리의 반응도 이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심지어 아시아·유럽정상회의(ASEM)는 북한의 돌이킬 수 없는 비핵화(CVID)를 못 박는 의장성명으로 선(先)제재 완화론을 일축했다.

그럼에도 현 여권은 대부분 북한이 핵을 포기하고 개방에 나설 것으로 믿거나, 믿는 척하는 눈치다.
평양선언과 군사합의서 비준을 밀어붙이는 데서 읽히는 기류다. 그러나 아무리 화려한 평화 이벤트를 연출한들 마술사가 모자 속에서 '평화의 비둘기'를 꺼내는 격이어선 곤란하다. 김 위원장이 실제로 핵을 내려놓고 주민을 억압하는 북한 체제가 변화하도록 이끄는 게 급선무임을 유념할 때다.kby777@fnnews.com 구본영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