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칼럼

[정훈식 칼럼] 자기모순에 빠진 비정규직 제로화

정훈식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18.10.25 16:47

수정 2018.10.26 11:18

[정훈식 칼럼] 자기모순에 빠진 비정규직 제로화

문재인정부가 최저임금에 이어 또 '과속사고'를 냈다. 이번엔 공공부문 비정규직 제로화 과속이 화를 불렀다. 일자리정부를 자임한 문재인정부는 작년 5월 출범과 함께 공공부문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을 일자리 정책 1순위에 올렸다. 정부기관, 지자체, 공기업에서 근무하는 계약직, 파견직 등 비정규직 50만명을 정규직으로 돌려 양질의 일자리를 만들겠다는 취지에서다.

문 대통령은 취임 직후 첫 외부일정으로 인천공항으로 달려갔다. 여기서 "비정규직의 눈물을 닦아주겠다"며 비정규직 제로화를 선언했다.
인천공항공사는 용역업체 소속 비정규직까지 합쳐 1만명을 정규직으로 돌리겠다고 화답했다. 이렇게 시작해 지난 9월까지 400여개 공공기관에서 10만명이 정규직(전환 확정 포함)이 됐다고 한다. 1년여 만에 공공기관 비정규직 4명 중 1명을 정규직으로 '신분상승'시켜 줬으니 이만한 성과가 따로 없다.

문 대통령 말마따나 국민에게 안정적인 일자리를 제공하는 데는 신분과 정년이 보장되는 공공부문 정규직만 한 게 없다. 그런 점에서 비정규직 제로화의 취지는 흠잡을 데 없다. 문제는 바로 그곳에서 기관장이나 고위직 임원들의 갑질, 이른바 '친인척 고용세습'이 자행되고 있다는 점이다. 서울교통공사가 발단이 됐다. 하지만 정부와 지자체 산하 공기업은 물론이고 정부기관까지 전방위적으로 고용세습이 저질러진 사실이 만천하에 드러나고 있다.

비정규직의 눈물을 닦아 주자고 멍석을 깔았는 데 친인척 고용세습이라는 '그들만의 잔칫상'을 차렸으니 기가 찰 노릇이다. 그러니 도덕적 해이를 넘어 국기문란이라는 말까지 나온다. 고용세습은 그 자체도 문제지만 다른 사람의 일자리를 빼앗아 가뜩이나 취업난에 허덕이는 청년들의 꿈과 희망을 짓밟는다는 점에서 척결해야 할 적폐다.

이 와중에 정부는 공공부문 맞춤형 일자리 5만9000개를 만들겠다고 한다. 그런데 이 일자리는 어떤가. 공기업·공공기관의 팔을 비틀어 만든 것으로 2~3개월짜리 초단기에 단순보조업무를 하는 임시 일자리에 불과하다. 문재인정부가 추구하는 양질의 정규직 일자리와는 거리가 멀다. 양질의 정규직 일자리는 고용세습으로 가로채고 진짜로 제대로 된 일자리가 필요한 청년층과 취약계층에는 허드렛일만 시키는 일이 벌어진다.

사상 초유의 고용재난에 최저임금·근로시간 단축의 속도조절이라는 근본처방을 외면한 채 허겁지겁 땜질로 대응하다 보니 자기 정책을 스스로 뒤엎는 모순이 눈앞에서 벌어진다. 그러니 '이러려고 비정규직 제로를 선언했느냐'는 비아냥이 나온다.


문 대통령은 올해 초 금융기관에서 채용비리가 불거지자 이를 적폐로 규정하고 철저한 조사와 함께 끝까지 책임을 묻도록 했다. 그런데 자신의 1호 정책에서 광범위하고 기가 막힌 부정이 생겼으니 할 말이 없게 됐다.
문 대통령으로선 정말로 아픈 지점이 아닐 수 없다.

poongnue@fnnews.com 정훈식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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