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칼럼 이구순의 느린걸음

[이구순의 느린 걸음] “규제하려면 법부터 정비하라”는 법원의 일침

이구순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18.10.30 17:30

수정 2018.10.30 17:30

[이구순의 느린 걸음] “규제하려면 법부터 정비하라”는 법원의 일침


자금세탁방지 가이드라인을 내놓고 은행을 앞세워 암호화폐에 대해 그림자 규제를 확장해 가던 금융당국에 대해 법원이 일침을 놨다. 코인이즈라는 국내 암호화폐거래소가 기존에 거래하던 농협은행으로부터 거래중단 통보를 받은 뒤 거래중단을 막아달라고 가처분소송을 낸 데 대해 법원이 답변을 내놓으면서다. 법원은 "금융위원회의 가이드라인은 은행의 의무사항이 아니다"라면서 은행이 계약을 맺은 기존 거래를 중단해서는 안된다고 판단했다.

법원 판결은 결국 정부가 법률적 효력 없는 가이드라인을 통해 은행 자율이라는 명분 뒤에서 규제권한을 확장하려 하지 말고, 규제를 하려면 법률적 근거를 정비하고 규제철학과 방식을 명확히 제시하라고 요구한 것 아닌가 해석된다.

최근 한 암호화폐거래소가 암호화폐 펀드 상품을 만들었는데 금융위원회가 '투자자 유의 권고'라는 보도자료 한 건을 내면서 펀드 출시가 좌절된 것은 물론이고 회사도 폐업 수순을 밟게 됐다.

암호화폐라는 정의가 없는 현행 자본시장법 조항에 맞춰 펀드를 금융당국에 신고할 방법을 찾지 못했던 이 회사는 결국 그림자 규제에 된통 당한 시범케이스가 됐다.
신고할 창구가 없어 신고도 못한 기업은 법을 어긴 기업으로 낙인이 찍혔다. 이로써 당분간 국내에서 암호화폐 펀드나 암호화폐 응용 금융서비스를 설계해 출시할 수 있는 간 큰 기업은 못볼 듯싶다.

블록체인·암호화폐가 신산업으로 주목을 끌기 시작한 지난 3년여간 국내 기업들이 정부에 요청했던 일관된 한가지는 '법률 정비'다. 강한 규제도 좋고, 복잡한 절차도 좋으니 게임의 룰을 만들어 달라는 요구였다.

길이 생기고 사람의 왕래가 많아지면 신호등을 세우고 횡단보도를 그려주는 것이 정부의 당연한 역할이다. 그 역할을 다하지 않은 것에 대해 국민은 '이게 나라냐'고 화를 내게 된다. 산업도 마찬가지다. 신산업이 생겨나고 기존에 없던 질서가 필요해지면 정부와 국회가 나서 법을 만들고, 기업들이 넘지 말아야 할 선을 그어줘야 한다. 그런데 우리 정부와 국회는 3년 이상 암호화폐 산업에 대해 임무를 방기하고 있다. 여전히 "실태조사를 진행 중이고, 해외사례를 살펴보는 중"이라는 원론적 답변으로 시간을 끌고 있다.

그사이 기업은 폐업을 걱정해야 하고 한국을 떠나 사업하겠다고 짐을 싸고 있다. 보다 못한 법원은 정부를 향해 가이드라인 말고 법률을 정비해 규제하라고 공개적으로 요청한다. 기업들의 요구와 같은 목소리다.

최근 곳곳에서 열리는 다양한 블록체인 콘퍼런스와 세미나를 다니면서 눈에 띄게 참가자 수가 줄었다는 것을 느낀다.
블록체인 산업의 열기가 급속히 식어가고 있는 것 아닌가 걱정될 정도다. 정부가 더 이상 귀닫고 눈감고 모르쇠로 일관하지 않았으면 한다.
게임의 룰을 만들어 산업이 성장할 수 있는 근거지를 만들어주는 게 정부와 국회의 존재 이유다.

cafe9@fnnews.com 이구순 블록포스트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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