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칼럼

[정훈식 칼럼] 난수표 같은 주택청약제도

정훈식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18.11.28 17:06

수정 2018.11.28 17:06

국토부 문답풀이만 129쪽.. 청약컨설턴트까지 나올판.. 누구나 알기 쉽게 고쳐야
[정훈식 칼럼] 난수표 같은 주택청약제도

나는 당첨운이 없다. 예나 지금이나 그렇다. 이런저런 행사에서 진행되는 제비뽑기에서 당첨확률이 80∼90%라도 제대로 걸리는 경우가 거의 없다. 아파트도 마찬가지다. 신혼이던 1990년대 초 내집장만의 꿈을 안고 청약한 경기도 고양 탄현의 D아파트는 경쟁률이 1.01대 1, 당첨확률이 99.9%인데도 떨어졌다. 그 뒤로도 여러번 청약에 도전했지만 역시 '꽝'이었다.
로또복권은 언감생심이다. 그래서 나는 통계의 확률을 안 믿는다. 아파트 청약을 포기한 것은 물론이다. 그래도 그때는 청약제도가 단순해 쉽게 청약에 나설 수 있었다. 주택 소유의 유무와 청약통장 가입기간만 신경쓰면 됐다.

난수표 같은 주택청약제도 때문에 예비 청약자들의 한숨 소리가 커지고 있다. 수십 수백가지의 자격요건과 조건을 따져봐야 하니 청약을 위해 몇날 며칠을 머리를 싸매야 한다. 천신만고 끝에 청약 관문을 통과해서 당첨을 받았다는 기쁨도 잠시, 계약 과정에서 자칫 부적격·부정 당첨자로 몰려 당첨이 취소되고 심지어 재당첨 제한이라는 옐로카드를 받기도 한다. 그러니 수천가지경우의 수를 따져야 하는 '대학입시 2탄'이라는 비아냥이 나온다.

왜 이렇게 됐을까. '실수요자에 우선공급'이라는 청약제도의 취지에다 두더지잡기식 투기근절 처방을 덧대며 누더기로 변질되면서다. 신혼부부 등 각종 우선 공급조건에다 무주택 기간이나 자녀 수 등을 따지는 청약가점 등등 따져봐야 할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국토부 인터넷 게시판의 청약관련 문답풀이 자료가 무려 129쪽에 달한다는 사실이 이를 잘 보여준다. 조변석개하는 청약제도 때문에 정책당국자마저 헷갈려하니 말 다했다. 1978년 청약제도가 도입된 후 40년간 138차례나 바뀌었다. 한 해에 평균 3번꼴이다. 문재인정부 들어서는 1년반 동안 11번이나 뜯어고쳤다.

청약제도가 워낙 복잡하다보니 자격과 조건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 청약에 나서 당첨됐다가 부적격·부정 당첨자로 몰려 당첨취소 등 불이익을 받는 선의의 피해자가 속출한다. 지난해 기준 부적격 당첨자가 9.4%로, 당첨자 열 중 하나는 복잡한 청약제도의 함정에 빠졌다. 청약의 문턱을 넘으면 분양대금 대출 문턱이 가로막는다. 대출조건을 따지는 일은 청약제도보다 더 어렵다. 부동산 전문가들마저 대출조건에 혀를 내두른다. 당첨을 받고도 대출이 안돼 포기해야 하는 상황까지 감수해야 한다. 그러니 주택시장에도 대입컨설팅처럼 청약컨설턴트가 등장하는 판이다.

주택청약 제도가 이렇게 꼬인 더 근본적 이유는 정책이 꼬였기 때문이다. 수급문제라는 시장원리를 외면한 채 정부가 규제 칼자루를 쥐고 일일이 시장에 개입해서 심판자 노릇을 하려다 보니 시장은 혼란스럽고, 국민은 골탕을 먹고, 행정효율은 떨어진다. 수급문제를 풀어서 시장이 안정되면 굳이 청약제도를 이렇게 복잡하게 만들 이유가 없지 않겠나.

정책은 예측 가능하고 누구나 알 수 있도록 간결해야 한다. 전 국민을 상대로 하고 재산권까지 연결되는 청약제도 같은 경우는 더더욱 그렇다.
조건이 아니라 제도를 누가 더 많이 이해하고 아느냐에 따라 내집마련 기회가 좌우되는 정책은 정책이 아니다. 김수현 청와대 정책실장은 2008년 자신이 출간한 '주택정책의 원칙과 쟁점'에서 주택정책 4대 원칙 중 일관성과 예측 가능성을 1순위에 올렸다.
김 실장과 당국은 청약제도를 간소화하는 것으로 그 원칙을 지켜보기 바란다.

poongnue@fnnews.com 정훈식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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