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구순의 느린 걸음]

암호화폐 '그레셤의 법칙'

'그레셤의 법칙'으로 불리는 '악화가 양화를 몰아낸다'는 경제이론이 있다. 품질이 떨어지는 악성화폐와 질 좋은 화폐가 동일한 가치를 인정받으면 사람들은 값어치 나가는 질 좋은 화폐는 지갑에 넣어두고 질 떨어지는 화폐로만 물건값을 지불한다. 결국 질 좋은 화폐는 유통되지 못해 화폐의 기능을 잃고 질 떨어지는 화폐만 화폐로 쓰인다. 악화가 양화(질 좋은 화폐)를 몰아내는 것이다.

요즘 암호화폐 시장에 대형 사기사건이 심심찮게 나온다. 블록체인·암호화폐 기술이나 원리는 모른 채 투자하면 돈이 된다는 기대를 갖고 있는 일반인에게 접근해 피해를 입힌 사례들이다. 사기사건의 장본인들은 시장에서 이름조차 들어보지 못한 암호화폐 거래소나 공동구매 사이트 같은 곳들이다. 그런데 정작 경찰이나 검찰이 수사를 통해 사기범을 잡았다는 소식은 들어본 적이 없다. 국내에만 100여개에 달한다는 '듣보잡' 거래소들은 여전히 암호화폐 개념조차 모르는 일반투자자를 대상으로 성업 중이다.

되레 정부가 내놓은 최소한의 기준과 상도의에 따라 영업하고 사용자를 보호하겠다고 나섰던 거래소는 검찰이 직접 기소했다는 소식이 들린다. 악화가 양화를 몰아내고 있는 것이다.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로버트 먼델은 "'그레셤의 법칙'은 악화와 양화가 동일한 가격으로 교환되는 정책조건 아래서만 성립한다"고 설명한다. 두 화폐가 동일한 가치로 유통되도록 보증하는 국가질서가 있으면 악화는 양화를 몰아낸다는 것이다. 반대로 정부가 질 떨어지는 화폐는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도록 규칙을 정해주면 그레셤의 법칙과 정반대 현상이 일어나 양화가 악화를 몰아내게 된다는 게 먼델의 주장이다. 사실 그레셤의 법칙도 그레셤이 여왕에게 편지를 보내 "악화와 양화가 같은 가치로 유통되도록 정책을 유지하면 안 된다"고 요청한 것이니 정책의 중요성을 강조한 법칙이다. 결국 악화가 양화를 몰아내도록 할 것이냐, 반대 현상을 만들것이냐를 판가름하는 것은 정책의 몫이라는 말이다.

지난해 9월 정부가 모든 형태의 암호화폐공개(ICO)를 금지한다고 선언하고, 올 1월 법무부 장관이 거래소 폐쇄를 추진하겠다고 밝힌 이후 1년 반 가까이 국회와 업계, 언론 모두가 정책을 만들어달라고 입을 모았다. 암호화폐를 거래하려면 어떤 법에 의해 어디에 등록·신고해야 하는지, 펀드상품은 누가 감독하는지 규칙을 만들어달라고 목청을 높였지만 올해도 정부는 답 없이 한 해를 끝내고 있다.

그러는 사이 시장에서는 최소한의 상도의를 따르려는 거래소들이 고사위기다. 반대로 규칙 따위 안중에도 없는 악화들은 여전히 기승을 부리고 있다.


더 이상 정부가 국민의 피해와 산업의 어려움에 모른 체하면 안 된다. 홍길동이 태어나 자라고 있는데도 없는 자식으로 모른 체하던 봉건시대의 구습이 대한민국에서 지속되는 것을 국민이 이해할 수 있겠는가 말이다. 지금이라도 블록체인·암호화폐 산업 전반의 정책 밑그림을 그릴 담당자를 정하고 규칙을 명확히 제시해 사기피해로, 산업발전 지연으로 피해보는 국민이 없도록 하는 것이 정부가 존재하는 이유다.

cafe9@fnnews.com 블록포스트 편집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