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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의도에서] 기교사법에서 자유로우신가요?

조상희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19.01.28 16:44

수정 2019.01.28 16:44

기교사법:재판할 때 미리 결론을 정해놓고 법리를 끼워맞추는 것
[여의도에서] 기교사법에서 자유로우신가요?

"기자님, 저희 얘기 한번만 들어봐주세요. 정말 억울한 부분이 많습니다."

몇 해 전 A기업 경영자가 배임 혐의로 수사를 받는 사실이 기사화되자 이 기업 관계자 B씨가 다급히 연락을 취해왔다. 잠시 고민을 했지만 그를 만나 입장을 듣게 됐고 검찰의 주장과 함께 A기업 측의 반론과 해명을 같이 실었다.

B씨는 실체적 진실이 가려질 법원 단계에서만큼은 여론이 한 방향으로 흘러가지 않기를 원했다. 자칫 판사가 공정한 결론을 내리는 것에 부담을 느끼지 않겠느냐는 이유에서다. 그는 균형감 있는 기사를 통해 법원이 여론을 의식하지 않고 소신있는 판결을 해 줄 것을 기대했다.
얼마 후 이 기업 경영자는 상급심 법원에서 배임 혐의 상당 부분이 무죄로 인정됐다. '공정성'을 최우선 가치로 삼는 수사기관과 법원이라고 해서 항상 옳을 수만은 없다는 지론을 갖게 해준 사건으로 기억된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 차장검사를 마지막으로 퇴직한 C변호사를 만났다. 그는 검사시절 공직자 신분에서 차마 하지 못한 얘기가 많은데 본인 역시 '기교사법'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는 말을 털어놨다. 평소 수사에 임할 때 좌고우면한 적이 없었다고 자신하던 그였기에 이런 실토가 당황스럽게 느껴졌다. 기교사법은 흔히 법조계에서 유무죄 판단을 미리 내려놓고 법리적 해석을 짜맞추는 것을 의미하는 용어로 사용된다.

그는 특정 사건이 들어왔을 때 선입견을 배제할 수 없었고 법리를 들이대며 재판에 넘긴 경우도 있었다고 했다. 최근 만난 D부장판사의 얘기는 더 놀라웠다. 그는 "가슴에 손을 얹고 기교사법에서 100% 자유로울 수 있는 법관은 없다"고 장담했다. 법리라는 것이 완전한 일관성을 가질 수 없기 때문에 재판 전 또는 초기에 심증이 형성되면 그에 따른 법리로 판결문을 써내려가는 경우도 종종 있다는 것이다.

물론 현직에 있는 모든 검사와 판사가 선입견을 가지고 수사나 재판에 임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최근 진행 중인 '적폐청산' 수사나 '사법농단 의혹' 수사에 대해 상당수 법조인들은 '별건수사'를 통한 기교사법이 자리잡고 있는 게 아니냐는 우려섞인 목소리를 내놓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목표를 정하고 수사를 하다보면 흔히 생기는 부작용이 반인권적으로 평가받는 별건수사다. 특정 범죄혐의를 밝혀내는 과정에서 마땅한 증거가 안 나올 경우 꼬투리를 잡아 어떻게든 혐의를 밝혀내는 후진적 수사방식이다. 피의자를 압박하기 위한 방식으로 악용돼 온 별건수사는 피의자 입장에서는 어떠한 혐의를 수사하려는지 선뜻 알기 어려워 방어가 어렵다.

지난달 세월호 유가족을 사찰했다는 의혹으로 검찰 수사를 받던 과정에서 이재수 전 기무사령관이 스스로 생을 마감하면서 적폐청산 수사를 둘러싼 별건수사 논란은 의혹을 더하고 있다.

검찰과 법원의 인사철마다 언론들이 앞다퉈 판사와 검사의 정치적 성향을 분석하는 기사를 경쟁적으로 내놓는 것도 어찌보면 기교사법이 곳곳에 존재한다는 방증이 아닐까. 문제는 기교사법이 가져올 폐해다.
실제로 과거사 사건 등에서 과거 수사기관과 사법부가 내린 부당한 결론으로 인해 국가가 인간다운 삶에서 소외받은 피해자들에게 막대한 배상금을 주는 경우를 종종 목도한다. 입법부와 행정부, 여론에 휘둘리지 않고 애초부터 독립된 헌법기관의 역할을 제대로 했다면 불필요한 사회적 비용을 아낄 수 있었을 것이다.
앞선 사례와 같은 법조인들의 양심고백이 더 이상 없는 사회로 나아가는 것만이 '정의의 최후 보루'라는 옛 믿음을 되찾는 지름길이다.

mountjo@fnnews.com 조상희 사회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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