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도에서]

이제 청와대가 답할 차례


집권 3년차에 즈음한 문재인정부의 친기업 행보가 예사롭지 않다. 집권 초기부터 친기업 행보가 없었던 건 아니다. 다만 정부가 가는 길에는 중소·중견기업만 있었다. 최근 정권의 기류 변화는 단연 대기업과의 관계 개선이다.

당장 문재인정부는 올 초 서울 여의도 중소기업중앙회에서 마련한 청와대 신년회에 4대 그룹 총수들을 불렀다. 이명박·박근혜 정부 시절에도 청와대 신년회에 대기업 총수가 참석자 명단에 오른 일은 없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최태원 SK 회장, 구광모 LG 회장은 지난해 9월 제3차 남북정상회담차 방북단에 참가한 지 석달여 만에 문 대통령과 만났다. 신년회가 끝난 지 불과 13일 후 문 대통령과 대기업 총수들은 또다시 얼굴을 맞댔다. 청와대는 20대 그룹 총수들과 중견기업인을 초청해 집권 후 첫 영빈관 기업인 간담회를 열었다. 대통령의 격식 없는 모습에 총수들이 마이크를 잡고 소신있게 건의하는 진풍경이 연출됐다.

청와대 산책 회동에 함께한 구광모 LG 회장은 취임 6개월 새 대통령과 무려 세 차례나 만나는 진기록을 세웠다. 보수정권에서도 찾아볼 수 없던 일들이다. 특히 현 정권과 삼성의 관계 개선은 백미다. 정권 초반 재벌개혁을 부르짖던 문재인정부의 최대 타깃이던 삼성은 어느새 친기업 행보의 상징적 존재가 됐다. 이재용 부회장은 지난해 7월 인도 노이다 스마트폰 공장 준공식에서 문 대통령과 처음 대면했다. 두 달여 뒤엔 방북사절단의 일원으로 대통령을 수행했고, 새해 들어서도 두 번 더 대통령을 지척에서 만났다. 이 부회장은 문 대통령이 집권 이후 가장 많이(네 차례) 만난 대기업 총수다.

주요 각료와 국회도 삼성과의 간극 좁히기가 한창이다. 지난달 10일 이낙연 국무총리가 삼성전자 수원사업장을 전격 방문, 5G 생산라인을 둘러봤다. 20일 뒤에는 홍영표 원내대표를 비롯한 여당 의원들이 삼성전자 화성 반도체사업장을 찾아 현장간담회를 열었다. 국무총리와 여당 의원들 방문 때마다 이 부회장이 직접 챙겼다. 홍남기 경제부총리도 삼성 방문을 저울질하고 있다는 이야기도 들린다. 현 정부가 개혁의 대상이던 대기업에 러브콜을 보내는 이유는 분명하다. 경제상황이 그만큼 어렵다는 방증이다. 고용참사와 추세적인 저성장 앞에서 결국 대기업의 도움이 절실해진 것이다. 일자리와 투자 확대는 문재인정부의 핵심 경제철학인 혁신성장과 포용성장을 실현할 쌍두마차다.

여하튼 대기업 총수들은 현 정권이 손을 내밀 때마다 열심히 달려갔다. 사업장을 방문한 정치인들에게도 성심껏 응대했다. 어색하고 어려운 청와대 간담회에서는 대통령 앞에서 용기를 내 최소한의 목소리도 냈다. 이제는 청와대가 답할 차례다. 여당과 정부도 마찬가지다. 현 정권의 수많은 소통에도 아직까지 그럴듯한 대기업 지원책들은 들리지 않는다. 최대 65%의 부담을 떠안아야 하는 가업상속세를 완화하겠다지만 대기업은 열외다. 세계 최고 수준의 상속세는 글로벌 기업으로 우뚝 선 국내 대기업의 지속경영에 큰 걸림돌이다. 여당은 경영권을 흔드는 상법 개정안을 추진하면서 대기업들이 촉구한 차등의결권은 벤처기업에만 도입하겠다고 한다. 이 외에도 최저임금 결정구조 개편, 탄력근로제 확대, 협력이익공유제 폐지 등 경영계가 줄기차게 건의한 경제정책들은 제대로 반영된 게 없다.
경영계에서 "대기업이 이벤트용이냐"는 볼멘소리가 슬슬 나오고 있다. 정경유착은 멀리해야 한다. 하지만 지금의 위기를 헤쳐갈 '정경신뢰'의 공은 정부 쪽에 있는 듯하다.

cgapc@fnnews.com 최갑천 산업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