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n논단]

사실과 진실 사이


페이크 홍수시대다. 범람하는 페이크를 헤치며, 사람들은 물에 빠진 자 지푸라기 잡으려는 듯, 사실과 진실을 찾으려 버둥댄다. 진실은 언젠가는 승리한다는 믿음조차 페이크가 될 것 같다.

사전적(辭典的)으로 사실은 '실제로 있었던 일'이나 '현재 있는 일', 진실은 '거짓 없는 사실'로 정의한다. 풀어 말하자면 진실은 사실이란 표면적 현상의 근본 배경까지 포용하는 총체적 실체를 의미한다.

나는 사실과 진실의 차이를 얘기할 때 역사적 사건 하나를 예로 든다. 1936년 베를린올림픽 마라톤에서 일본대표 손기정 선수가 우승했다. 사실이다. 하지만 진실은 다르다. 베를린올림픽 마라톤에서 우승한 일본대표 손기정 선수는 조선인이다.

세상에 통용되는 사실들 중 어떤 것은 그 진실과 차이가 엄청나다. '번갯불에 콩 구어 먹는다'는 속담이 대표적이다. 주변에 물어보면 열에 아홉은 동작이 번개처럼 빠른 의미로 알고 있다. 진실은 다르다. 이 격언의 진짜 뜻은 자기 죽을 줄도 모르고 번갯불에 콩 볶으려 덤벼드는 구두쇠 같은 행동, 그런 무모한 짓을 하는 인간을 비판할 때 써야 할 속담이다. 생각해 보시라. 단지 번개처럼 빠름을 뜻한다면 그게 무슨 속담이고 격언인가. 무릇 속담이란 그 속에 풍자, 비판, 교훈을 품은 짧은 구절이다. 빠르다는 우리말 표현엔 '마파람에 게 눈 감춘다' '두꺼비 파리 잡아먹듯이' 같은 멋진 비유가 존재한다. 정 못 믿겠거든 박경리 선생의 소설 '토지'를 참고하시라. 작품 곳곳에 번갯불에 콩 구워 먹을 듯 노랑이짓 하는 인간이란 표현이 많이 나온다.

하룻밤을 자도 만리장성을 쌓는다는 속담도 원래 뜻과는 너무 멀다. 요즘 통용되듯이 부부란 '하룻밤만으로 깊은 인연을 맺는다'는 의미가 아니다. 알고 계시겠지만 혹여 과문한 이를 위해 되풀이한다. 이 속담은 진시황 시절 한 사내의 만행을 통해 죄짓지 말라는 경계의 격언이다. 당시 만리장성 축조에 끌려가면 성이 완성되기 전에는 돌아오지 못했다고 한다. 한 사내가 결혼 초에 신랑이 성 쌓는 데 잡혀가 청상과부 신세가 된 어느 새색시를 겁탈하려 덤벼들었다. 위급해진 새댁은 한 가지 조건을 내민다. 자신이 만든 옷을 신랑을 찾아가서 전하고 증표를 받아오면 어차피 살아오기 힘든 남편이니 사내를 따라가겠다고 약속한다. 하룻밤을 치른 사내놈은 공사장으로 달려간다. 돈 몇 푼으로 감독관을 꼬시자, 신랑에게 옷을 갈아입히려면 공사장 밖으로 불러내야 되니 그동안만 사내가 대신 들어가 있어야 된다고 말한다.


밖으로 불려나온 신랑이 옷보자기를 펼치자 옷 깊숙한 곳에서 편지를 발견한다. "내 목숨을 구하고 당신을 탈출시키려 몸을 더럽혔소. 탓하지 않겠다면 옷을 입고 도망을 나오고 탓하려거든 돌아가시오." 그 후로 만리장성 공사판에서는 사내 한 놈이 넋이 나간 채 홀로 중얼거리고 다녔다고 한다.

"하룻밤을 자고 만리장성을 쌓는구나!" "하룻밤을 자고 만리장성을 쌓는구나!"

오늘도 수많은 뉴스와 정보가 쏟아졌다. 그들은 거짓 없는 사실일까? 우리가 철석같이 믿고 있는 수많은 사실들, 그들 모퉁이에 우리가 상상 못한 진실이 숨어있는 건 아닐까.

이응진 한국드라마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