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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의나루] 이념이 필요 없는 시대

안삼수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19.04.04 17:39

수정 2019.04.04 17:39

[여의나루] 이념이 필요 없는 시대

'어떻게 민주주의는 무너지는가.' 하버드대 스티븐 레비츠키, 대니얼 지블렛 두 교수의 저서이다. 저자들은 세계 여러 곳의 민주주의가 무너진 사례를 통해 민주주의의 제도적 안전성에 관해 살피고 있다. 민주주의는 제도 자체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미국 헌법은 견제와 균형을 제도화한 매디슨 시스템으로 오랜 세월을 견뎌왔다. 하지만 좋은 헌법만으로 건강한 민주주의가 지속될 수는 없다. 암묵적인 두 가지 정치적 규범이 미국 사회를 지탱해 왔다고 한다.
상호 관용(tolerance)과 자제(forbearance)가 그것이다. 상호 관용에 따라 양 당은 서로를 정당한 경쟁자로 받아들였고, 시한부로 주어진 제도적 권리(권한)를 당의 이익만을 위해 활용하지 않는 자제력을 발휘했다. 미국의 당파 싸움이 파멸로 이어지지 않은 것은 이 같은 규범 덕분이었다. 미국의 민주주의가 위기에 처한 것은 바로 관용과 절제의 규범이 흔들리고 있기 때문이다. 양당이 상대를 정당한 경쟁자로 인정하지 않고, 승리를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게 된 것이다. 오바마를 거쳐 트럼프 대통령에 이르러 심화된 당파적 양극화가 미국 민주주의 위기의 뿌리라고 두 교수는 진단한다.

그런 기준에 의하면 한국의 민주주의는 오래전부터 위기에 처해 있다. 우리는 산업화와 민주화를 성취했다고 자부한다. 하지만 과연 대한민국이 진정한 민주사회인지 의구심을 가질 때가 많다. 이른바 보수와 진보는 관용은커녕 서로 척결해야 할 적으로 대하는 게 일상이다. 집권한 세력은 상대를 궤멸시키기 위해 주어진 권력을 무리하게 동원한다. 자제란 찾아볼 수 없다. 정치의 극단적 양극화는 자연스러운 결과물이다. 보수와 진보, 좌파와 우파, 촛불과 태극기, 민족주의 세력과 동맹우선 세력이 서로 증오감을 표출한다. 당파적 양극화는 현 정권 들어 더 심해졌다. 집권 여당 대표는 '보수세력 궤멸'과 진보세력 20년 집권론을 거리낌 없이 내뱉는다. 야당 역시 상대를 '종북' '주사파' 등으로 규정한다. 작용과 반작용의 원리지만 위기를 느껴야 하는 시점이 아닐 수 없다. 그런 점에서 시민사회단체 초청 행사에서 있었던 문재인 대통령의 발언은 뜻밖이다. "이제 보수나 진보나 이런 어떤 이념은 정말 필요 없는 시대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오로지 우리 사회 발전이나 국가 발전을 위한 어떤 실용적인 사고, 이런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뜻밖이라 생각한 이유는 문 대통령이 과거 "보수세력을 불태워야 한다"는 발언을 한 바 있기 때문이다.

문 대통령 발언의 진의를 의심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현 시점에서 대한민국을 위해 가장 시급하고 중대한 과제를 지적한 것으로 본다. 극단적인 당파적 양극화가 유럽과 남미 등 여러 국가의 민주주의를 죽음에 이르게 한 역사적 사실을 직시할 필요가 있다. 이제는 문 대통령이 자신의 말을 실행에 옮기는 데 앞장서야 한다. 이념을 넘어 민주주의의 기본 규범인 관용과 자제의 정신을 되살리는 것이다. 상대를 적이 아닌 정당한 경쟁자로 인정하고, 권력행사에 있어 자제력을 발휘해야 한다. 아직 시간은 많이 있다. 문재인정부는 햇수로 3년차지만 만 2년이 되지 않았다. 대통령이 먼저 "우리 사회 발전이나 국가 발전을 위한 실용적 사고"를 한다면 모든 국민의 동참을 이끌어낼 수 있을 것이다. 보수와 진보, 좌와 우, 촛불과 태극기의 구별이 있을 수 없다. "어떤 정당도 혼자서 민주주의를 끝낼 수 없다. 마찬가지로 어떤 지도자도 혼자서 민주주의를 살릴 수 없다.
민주주의는 우리 모두가 공유하는 시스템이다. 그러므로 그 운명은 우리 모두의 손에 달려 있다.
" 저자들의 처방이다.

노동일 경희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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