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칼럼

[곽인찬 칼럼] 코뿔소에 둘러싸인 한국 경제

곽인찬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19.04.08 16:53

수정 2019.04.08 16:53

"저건 코뿔소가 아닐 거야" 부정본능에 사로잡혀서 인구·규제 위험 못 본 척
[곽인찬 칼럼] 코뿔소에 둘러싸인 한국 경제

10여년 전 금융위기가 터지고 동물 두 마리가 유명세를 탔다. 한 마리는 검은 백조. 백조는 다 희다. 그래서 백조(白鳥)다. 검은 백조는 희귀 별종이다. 그만큼 금융위기가 예측하기 힘든 사건이었단 뜻이다. 다른 한 마리는 회색 코뿔소. 집채만 한 코뿔소는 위험하다.
위험하다는 걸 알지만 선뜻 손을 쓰지 못한다. 어떤 이는 겁에 질린 나머지 자리에 주저앉고, 어떤 이는 "저건 코뿔소가 아니다"라고 애써 외면한다. 어느 쪽도 슬기로운 대응이 아니지만 현실에선 그런 일이 흔하다.

'회색 코뿔소가 온다'를 쓴 미셸 부커의 말을 들어보자. "인간은 거대한 위험에 맞닥뜨리면 본능적으로 몸이 얼어붙기 마련이다. 때로는 부정 본능에 강하게 사로잡혀 위기를 전면 부정하고,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는다." 골초 흡연자, 도박 중독자 등이 그런 사람들이다.

부커의 말을 들으니 타조 생각이 난다. 타조는 위험이 닥치면 머리를 땅속에 파묻는다. 세상에 이런 어리석음이 또 있을까. 그런데 가만, 과연 타조만 그럴까. 건강검진을 싫어하는 이들이 의외로 많다. 괜히 이상한 병이라도 나오면 어떡하나 걱정이 된다는 것이다. 고백하건대 나도 그랬다. 무슨 병이든 조기 발견이 중요하다. 누구나 이 사실을 안다. 하지만 행여 "당신 암이요" 소리 들을까 무서워 검진을 차일피일 미룬다.

범위를 사회 전체로 넓혀도 마찬가지다. 저기 코뿔소가 있다는 걸 알면서도 짐짓 모른 체할 때가 많다. 부커가 보기엔 금융위기 전 미국이 그랬다. 나중에 앨런 그린스펀 전 연방준비제도 의장은 "위험신호가 약했다"고 말했다. 부커는 "신호가 약한 것이 아니라 위험신호에 주의를 기울이고 기꺼이 대응하려는 의지가 없었다"고 비판한다. 사람은 나 혼자 옳은 것보다 다 같이 틀리는 쪽을 선택한다고 했던가. 부커는 집단사고를 경계하라고 누누이 강조한다.

그럼 우린 회색 코뿔소에 잘 대응하고 있을까. 어림 반 푼어치도 없다. 통계청은 50년 뒤 한국 인구가 4000만명 아래로 떨어질 걸로 본다. 2067년에 중위연령, 곧 전 국민을 나이순으로 세웠을 때 한가운데 있는 사람의 나이가 62.2세가 된다. "이게 나라냐"는 한탄이 절로 나올 판이다. 하지만 정부 대응에선 긴박감을 찾을 수 없다. 단일민족 도그마에 빠져 이민을 넓힐 엄두조차 못 낸다. 우리 인구정책을 한마디로 평가하면 "이러다 어떻게 되겠지 뭐"로 요약된다.

경제는 규제에 갇혀 옴짝달싹 못한다. 규제를 풀겠다는 다짐은 보수·진보 정부를 가리지 않는다. 문재인정부도 혁신성장을 말한다. 하지만 딱히 되는 건 없다. 한국에서 규제를 깨는 건 마치 달걀로 바위를 치는 격이다. 꽤 오래전 세계적인 컨설팅회사 맥킨지는 한국 경제를 '서서히 뜨거워지는 냄비 속 개구리'에 비유한 적이 없다. 탁견이 아닐 수 없다. 지난해 말 박용만 대한상의 회장은 "땀을 뻘뻘 흘리던 냄비 속 개구리가 이제 피부 곳곳에 화상이 생기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트로이 공주 카산드라의 예언은 늘 불길했다. 그리스군이 보낸 목마를 받으면 트로이가 망한다고 경고했다. 하지만 트로이인들은 카산드라의 예언을 믿지 않았다. 결과는 참혹했다. 트로이는 망했다. 위험신호를 외면한 대가다.
듣기 싫어도 듣고, 하기 싫어도 해야 할 때가 있다. 한국 경제는 코뿔소 무리에 둘러싸여 있다.
그중에서도 저출산이라는 코뿔소, 규제라는 코뿔소가 보내는 위험신호는 매우 강력하다. 언제까지 이 상황을 외면할 텐가.

paulk@fnnews.com 곽인찬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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