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칼럼

[정순민 칼럼] '빠루'에 대한 명상

정순민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19.05.01 17:07

수정 2019.05.01 18:08

금수회의장 변질된 국회
패스트트랙에 모두 치여
여야 부끄러운줄 알아야
[정순민 칼럼] '빠루'에 대한 명상

'빠루'는 공사판에서 굵은 못을 뺄 때 사용하는 쇠막대다. 허리를 구부리지 않고도 발 아래 박혀 있는 못을 뽑을 때 유용하다. 반대쪽은 평평한 날로 되어 있어 지렛대로도 사용할 수 있다. 구부러진 부분이 노루 발처럼 생겼다고 해서 '노루발 못뽑이'라고도 하고, '배척'이라는 점잖은 이름으로도 불린다. 영어로는 크로우바(crowbar)라고 쓰는데, 일본사람들이 앞부분은 생략하고 뒷부분(bar)만 따로 떼어내 '빠-루'라고 부른 데서 유래했다.

최근 이 공사판 연장이 매우 유용하게 쓰이는 광경을 온 국민이 목격했다.
지난달 26일 패스트트랙(신속처리안건) 지정 문제로 여야가 한치의 양보도 없이 극한대치를 이어갈 때 이 긴 쇠막대가 등장했다. 야당인 자유한국당 의원들이 패스트트랙 안건 처리를 막기 위해 국회 의안과 사무실을 점거하고 출입구를 봉쇄하자 여당인 더불어민주당과 국회사무처가 닫힌 문을 열기 위해 이 도구를 동원했다.

오랜만이긴 했지만 사실 빠루가 국회에 등장한 건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시간은 11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지난 2008년 12월 국회 외교통상통일위원회가 당시 여당인 한나라당(현 자유한국당) 소속 의원만 참가한 가운데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비준 동의안을 강행 처리하려 하자 야당인 민주당이 이를 저지하기 위해 회의장 출입문을 빠루와 쇠망치로 부수는 일이 벌어졌다. 하지만 이날 빠루는 조연에 불과했다. 국회를 아수라장으로 만든 건 길쭉한 빠루가 아니라 하얀 소화기 분말과 물대포였다. 회의장 진입을 시도하는 민주당 의원들을 향해 한나라당 당직자들이 소화기를 쏘아대자 민주당 측에선 소방용 호스를 이용한 물대포로 맞섰다.

신성한 국회에 최루탄이 난무한 적도 있다. 2011년 11월, 이때도 역시 한·미 FTA가 쟁점이었다. 한나라당이 회의 시작 4분 만에 비준안을 강행 처리하자 이에 불만을 품은 김선동 당시 민주노동당 의원이 사제 최루탄을 터뜨렸다. 당시 월스트리트저널은 '최루탄 폭파범(bomber)은 기소될까'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김 의원은 스스로를 일제강점기 독립투사에 비유하고 있다"고 비꼬았다. 이 사건으로 김 전 의원은 총포·도검·화약류 등 단속에 관한 법률 위반 혐의로 기소돼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고 의원직을 상실했다.

이른바 몸싸움 방지법, 즉 국회선진화법이 만들어진 게 바로 이 무렵이다. 대화와 타협의 정신을 살려가자는 뜻에서 만들어진 이 법안의 핵심 내용 중 하나가 이번에 사달이 난 패스트트랙이다. 국회선진화법은 그동안 날치기 통과를 위한 수단으로 오·남용돼온 국회의장 직권상정을 원천봉쇄하고, 각 교섭단체 대표와 합의된 경우에 한해서만 법안을 상정할 수 있도록 요건을 강화했다. 그러나 누구나 다 알고 있듯이 '합의'라는 것이 어디 그리 쉬운 일인가. 이럴 때를 대비해 재적 5분의 3 이상이 찬성하면 설령 합의하지 못했더라도 국회의장이 해당 법안을 신속처리 대상 안건으로 지정할 수 있게 했는데, 이게 바로 패스트트랙이다.

우여곡절 끝에 선거제·검찰개혁 법안 등 4법이 패스트트랙에 태워졌다. 그 과정에서 너나없이 모두 치명상을 입었다. 빠루로 문을 부수려 했던 쪽이나 그걸 빼앗아 전리품처럼 흔들어댄 쪽이나 민망하기는 마찬가지다. 이제 남은 일은 '금수회의장(禽獸會議場)'이나 다름없던 국회를 정상으로 돌려놓는 일이다. 물론 쉬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고소·고발과 장외투쟁만이 최선이 아닌 것은 분명하다. 패스트트랙은 최장 330일간 논의를 펼칠 수 있게 되어 있다.
이 기간 안에 '신의 한 수'가 나오기를 바란다.

jsm64@fnnews.com 정순민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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