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경제 식품

루이7세와 이혼한 왕후..엘리아노르, 영국에 보르도를 선물하다 [김관웅 선임기자의 '비즈니스 와인']

김관웅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19.05.23 18:18

수정 2021.11.07 15:08

(3) 와인의 경제학 영원한 라이벌, 보르도와 부르고뉴 (下)
엘리아노르(왼쪽)과 영국왕 헨리2세의 모습. 사진=위키피디아
엘리아노르(왼쪽)과 영국왕 헨리2세의 모습. 사진=위키피디아

필리프 2세. 사진=위키피디아
필리프 2세. 사진=위키피디아

진하고 복합적인 맛과 여리여리하고 섬세한 맛, 대서양을 오가는 교역상과 은둔의 수도사, 첨단으로 무장한 기술과 투박하지만 변하지 않는 전통, 캐피털리스트와 안티캐피털리스트….

세계 와인산업을 대표하는 프랑스 '보르도(Bordeaux) 와인'과 '부르고뉴(Bourgogne) 와인'을 말할때 종종 인용되는 비교입니다. 앞에 나열된 것은 보르도이고 뒤쪽이 상징하는 것은 부르고뉴입니다. 이처럼 보르도와 부르고뉴는 영원한 라이벌 답게 와인의 맛과 제조방식은 물론이고 걸어온 길이 너무도 다릅니다. 보르도는 자본과 기술이 집약된 샤또에서 화려하고 진한 향의 와인을 대량으로 생산합니다. 반면 부르고뉴는 가족 중심의 소규모 와이너리에서 자신들의 가문에서 전해오는 전통기술로 소량의 와인을 생산합니다. 각기 와이너리마다 다양한 색깔의 와인을 빚어내지만 한결같이 아주 맑고 섬세한 와인이라는 공통점을 보입니다.


프랑스보다 더 영국을 닮은 보르도 와인

보르도 와인을 말할때 영국을 떠올리는 와인 전문가들이 많습니다. 왜 일까요. 프랑스 남서부에 위치한 보르도는 2세기부터 와인을 빚기 시작해 4세기에 이미 유명세를 떨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보르도 와인이 진짜 유명해진 것은 바로 백년전쟁의 시초가 됐던 아키텐 공국의 공주이자 프랑스 왕 '루이(Louis)7세'의 왕후이던 '알리에노르(Alienor)' 때문입니다. 엘리아노르가 루이7세와 이혼하고 앙주의 백작이자 향후 영국의 헨리2세와 재혼하면서부터 보르도는 영국과 인연을 맺게 됐습니다. 이후 300년간 영국이 소유권을 행사하면서 프랑스 보르도 와인산업은 급속하게 발전하기 시작합니다.

보르도와 영국의 인연은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보르도 와인의 가장 큰 특징은 블랜딩 와인입니다. 힘찬 아로마와 강한 타닌을 가진 '까베르네 쇼비뇽', 부드러운 질감과 진한 맛을 내는 '멜롯', 가볍지만 카랑카랑한 질감을 주는 '까베르네 프랑'이 섞인 보르도 와인은 정말 세련되고 진한 맛을 냅니다. 그런데 보르도의 이같은 블랜딩 기법에 열광한 것은 바로 영국인들이었습니다.

보르도 와인의 또 다른 특징은 숙성이 천천히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보르도 와인이 익기전에는 떫은 맛이 강하지만 시간이 지나 제대로 익기 시작하면 맛이 훨씬 좋아진다는 것을 안 것도 영국인입니다. 그래서 영국인들은 보르도 와인을 사서 쟁여뒀습니다. 반면 프랑스인들은 와인을 만들어 그 해에 모두 마셔버렸습니다. 햇 와인이 나올때쯤이면 그 전해에 담근 와인을 외면해 값이 뚝 떨어졌다고 합니다. 그래서 우스갯소리지만 '프랑스는 와인을 만들고, 영국은 와인을 평가한다'는 말이 나왔습니다. 영국인의 각별한 보르도 와인 사랑이 오늘날 보르도 와인을 만들었다는 점에서 보면 일리있는 말이기도 합니다.

프랑스 시골 농부를 닮은 부르고뉴 와인

반면 부르고뉴 와인은 순수한 프랑스 농부의 이미지와 많이 겹쳐집니다. 프랑스 북동부에 위치한 부르고뉴는 1세기에 로마인들이 넘어오면서 포도 재배가 시작되고 와인이 만들어졌습니다. 로마인 물러난 후 가톨릭교회와 수도원을 중심으로 십자군전쟁이 시작되면서 와인산업이 변화를 맞기 시작합니다. 특히 '클뤼니(Cluny) 수도원'에서 떨어져 나온 '시토(Cistercian) 수도회'가 부르고뉴 와인산업을 크게 발전시키게 됩니다.

그러나 오늘날 부르고뉴를 명품 와인산지로 만든 것은 부르고뉴 공국의 '필리프(Philip) 2세'입니다. 필리프 2세는 1200년대 초 부르고뉴에서 '가메' 품종의 포도나무를 모두 뽑아버리고 '피노누아' 품종 한 가지만 심도록 명령을 내립니다. 가메 품종으로 와인을 만들면 그 맛과 향이 피노누아에 미치지 못한다는 이유였습니다. 당시 부르고뉴에서는 가메와 피노누아 두 가지 품종이 재배됐는데 농부들이 가메를 선호하자 이같은 조치를 내린 것입니다. 피노누아는 워낙 재배하기가 까다로운 품종인데다 기후나 재배방법에 따라 수확량이 크게 차이난 반면 가메는 병해에도 강하고 수확량도 많고 늘 일정했습니다. 가메 품종은 이후 부르고뉴 남쪽의 보졸레 지역에서만 재배되게 됩니다. 오늘날 보졸레 누보 와인으로 유명해지게 된 계기입니다. 필리프 2세는 포도밭에서 수확량을 늘리기 위해 비료를 주는 것도 금지시켰다고 합니다. 아마도 포도가 척박한 땅에서 자랄수록 좋은 맛을 낸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지리적 입지가 오늘날의 명성 만들어

부르고뉴 와인은 보르도 와인보다 더 고급스럽고 비싼 와인으로 인정 받습니다. 그런데 중세시대와 근대까지는 보르도 와인이 인기가 훨씬 높았습니다. 이는 지리적 입지와 당시 운송수단의 한계 때문이었습니다.

보르도는 한강처럼 큰 지롱드강과 대서양이 접한 지리적 특성을 살려 교역이 활발히 일어나면서 와인산업이 발전했습니다. 지롱드 강 주변으로는 위치한 메독, 생떼에스테프, 생 줄리앙, 마고, 포므롤, 생떼밀리옹 등에서 질 좋은 포도가 생산되지만 이같은 지리적 이점이 없었다면 오늘날의 명성을 갖지 못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부르고뉴는 내륙 한가운데 있고 강이 멀리 떨어져 있어 무역이 불가능했습니다. 더구나 당시에는 코르크도 없고 그냥 오크통으로 운송되던 시기여서 와인을 오랫동안 보관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다 1700년대부터 도로가 생기고 1832년 부르고뉴 운하, 1851년 파리를 잇는 디종철도가 개통되면서 부르고뉴 와인이 본격적으로 유명해지기 시작했습니다. 부르고뉴의 유명 네고시앙들도 이때부터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정장을 잘 차려입은 '차도남(차가운 도시의 남자)'같은 보르도 와인을 좋아하나요, 아니면 찢어진 청바지에 흰색 셔츠를 입은 '만찢남(만화를 �고 나온 남자)'같은 부르고뉴 와인에 더 눈길이 가시나요.

▶다음 편은 '타협을 거부한 고집이 만든 명품, 바롤로'가 이어집니다.kwkim@fnnews.com 김관웅 기자

fnSurve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