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팬 톡]

韓·日 닮은꼴 연금정치


보고서 하나가 일본 사회를 뒤흔들고 있다.

정부 보고서를 정부가 부정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는데, 내용인즉슨 이렇다. 지난 3일 일본 금융청(한국의 금융위원회 격)은 이름하여 '고령사회 자산 형성·관리'라는 제목의 56쪽짜리 보고서 하나를 발표했다. '수명이 늘어나니, 자산수명도 늘려야 한다.' '시산을 해보니 100세까지 살려면 연금 외에 노후자금으로 2000만엔(약 2억1800만원)이 더 필요하다. 그러니 각종 금융투자와 재테크로 스스로 노후를 자조(自助)하라'는 것이다. 격앙된 반응들이 포털사이트와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서 분출했다. "'연금 100년 안심' 약속은 어디로 갔느냐" "정부의 태만을 왜 국민에게 돌리느냐"며 여론이 들끓었다.

당초 초안(5월 22일)에 명기했던 '중장기적으로 연금의 실질적 감소'라는 표현을 '연금의 조정'으로 애매모호하게 수위를 조절했음에도 파장이 컸다. 일본 야당에선 내달 참의원 선거 재료로 쓰겠다며, 아베정권의 연금정책 실패론을 부각시키는 모습이다.

'그놈의 정무적 감각'이 부족한 금융청 공무원이 만든 보고서 하나가 '미필적 고의'에 의해 자민당의 7월 참의원 선거와 아베 총리의 개헌 가도에 복병으로 부상한 것. 발표 후 열흘 가까이 지났지만 성난 민심이 잦아들지 않자 아소 다로 재무상 겸 부총리가 보고서 채택을 거부하겠다며 진화에 나섰다. "정부 정책 기조와 맞지 않다"는 변도 곁들였다. 금융청의 젊은 공무원이 지난해 9월부터 9개월간 경제·금융 전문가들과 12번 회의 끝에 만든 보고서는 그렇게 일순간 부정당했다. 채택을 거부한다고 해서 노후에 2000만엔이 더 필요하다는 계산 결과가 사라지진 않는다. 선거를 앞두고 우선은 급한 대로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려보자는 것이다.

보고서 파동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불똥은 다시 후생노동성으로 튀었다. 사실 금융청이 제시한 '2000만엔' 근거는 후생노동성이 제공한 것. 그러자 후생노동성 담당 과장은 금융청 회의 때 참관한 바는 있지만 자신 역시 총무성의 가계조사에서 인용한 데이터였다고 주장했다. 숫자의 근원을 찾아 고구마 줄기 엮듯 내각 조직이 하나씩 얽혀들어가는 상황인데도 경제수장은 이를 원천 부정하는 촌극이 벌어진 것이다. 이 상황을 마이니치신문은 한마디로 "전대미문의 부조리극"이라고 평했다. 금융청 담당자는 억울하기 짝이 없다. 초고령사회에 대응하고자 고령자에 대한 금융서비스 강화정책을 만들 요량으로 보고서를 만들었다고 한다.

일본에서 벌어지는 이 부조리극에 묘한 기시감이 든다. 불과 8개월 전이다. 지난해 11월 문재인 대통령이 보건복지부가 보고한 국민연금 개혁안 초안에 퇴짜를 놓은 사건이 있었다. 1년간 실시한 국민연금 장기 재정수지 계산 결과를 토대로 연금제도 개편안을 만들고, 대국민 의견수렴까지 거친 안이었지만 재검토 지시를 받은 것. 당시 청와대의 변은 "국민의 눈높이에 맞지 않다"였다. "정부 정책 기조와 맞지 않다"는 아소의 변과 닮았다. 이후 복지부가 '조금 더 내고, 그보다 더 많이 받는 수치'로 수정해 청와대 문턱은 넘었으나 지지부진한 논의 속도를 보면 내년 총선 전까지 연금개혁은 물 건너간 듯하다.


다시 일본으로 돌아가자. 보고서 파문의 여파 속에 5년에 한번씩 발표되는 연금급부 장기재정 추계가 차일피일 미뤄지고 있다. 표심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 일단 7월 참의원 선거는 넘겨보자는 의도가 다분하다. 연금 고갈(한국), 연금지급액 축소에 대한 불안(일본) 그리고 "안심하라" 다독이며 국민의 심판 시기는 일단 넘기고 보자는 '연금정치'가 어딘가 모르게 참 닮았다.

ehcho@fnnews.com 조은효 도쿄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