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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의나루] 기수는 숫자에 불과하다

안삼수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19.06.27 17:27

수정 2019.06.27 17:27

[여의나루] 기수는 숫자에 불과하다
"그 새끼 모가지 잡아서 당장 끌고 와." 지금도 흥분에 젖은 그 목소리가 생생하다. 자신이 청구한 영장이 기각된 후 변호사에게 건 전화였다. 수사뿐만 아니라 영장실질심사에까지 참여했다가 기각됐으니 자존심이 상했을 것이다. 그렇다고 불구속 상태인 피의자의 사정상 조사일자를 조금 늦춰달라는 변호인에게 할 말은 결코 아니었다.

검사는 시민의 인권을 수호하기 위해 탄생한 제도다. 많은 검사들이 정의실현과 인권수호라는 양립되기가 결코 쉽지 않은 가치 사이에서 고군분투하고 있다.
아쉽게도 좋은 것보다는 나쁜 것이 더 강하게 각인된다. 수많은 노력이 한 개인의 오만과 독설로 쉽게 무너져버리게 된다. 그가 아직도 검찰에 남아 검사장 승진을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이 섬뜩하다.

검경수사권 조정에 대한 변호사들의 설문조사에서 60%가 찬성했다. 검찰의 수사능력이나 인권의식이 경찰보다 부족하기 때문이 아니다. 권력에는 충성하면서 국민에게는 군림하는 검찰이 싫다는 것이 이유라고 본다. 검찰은 검사동일체라는 철저한 상명하복으로 조직이 작동된다. 이를 위해서 서열이 필요한데, 사법연수원 기수가 가장 쉽게 적용될 수 있다.

윤석열 검찰총장 지명자는 전임 총장에 비해 연수원 5기 아래다. 관행상 선배나 동기 검사장들이 대거 퇴직하면서 조직이 흔들릴 것이라는 우려가 있다. 그러나 이런 관행은 아주 오래된 것이 아니라 김대중 대통령 시절부터라고 검찰총장을 지낸 변호사로부터 들었다. 이미 법조계의 다른 두 축에서는 기수 파괴가 이뤄졌다.

사법부에서는 전임보다 사법연수원 13기 후배인 김명수 대법원장이 취임했다. 파격적이라고 했지만, 아직 다수의 연수원 선배와 동기 법관들이 법원에 남아 법관으로서 본연의 임무를 성실히 수행하고 있다. 이미 발의된 사법개혁 관련 입법이 국회에서 통과되지 못해서 그렇지 실제로 법원 개혁을 위한 많은 준비들이 계속해 진행되고 있다.

선거로 결정되기에 임명직과는 차이가 있지만, 대한변협회장 역시 전임보다 연수원 기수가 13기나 낮은 필자가 당선됐다. 현재 대한변협 부협회장 중 70%는 협회장보다 연수원 기수가 높다. 심지어 상임이사 중에는 협회장보다 18기나 높은 선배 변호사도 있다. 모두 맡은 바 임무에 최선을 다하면서 아무런 문제없이 조직이 가동되고 있다.

검찰 역시 전·현 총장 사이에 사법연수원 기수 차이는 문제가 아니라고 본다. 오로지 국민만 바라보면서 거악을 척결할 강한 정의감, 검찰의 독립성과 정치적 중립성에 대한 확고한 신념, 조직을 이끌어갈 수 있는 탁월한 리더십 등이 인사청문회에서 검증돼야 할 것이다.

필자는 서울지방변호사회장을 하면서 업무 상대방으로 서울중앙지검장이던 윤 지명자와 소통한 경험이 있다.
영장실질심사 결과의 휴대폰 통지, 조사에 참여한 변호사의 메모 허용, 피의자의 휴식권 보장 등 그동안 변론권 보장을 위해 검찰에 수없이 요청했지만 대답이 없던 제도의 개혁들이 그의 결단으로 신속하게 이뤄졌다.

문제는 적폐청산이라는 이름으로 계속되는 수사에 대한 피로감, 사회의 치유가 아니라 갈등을 심화시키는 먼지떨이식 수사가 아니냐는 불안감을 어떻게 해소하면서 조직의 안정과 개혁이라는 과제를 조화롭게 풀어나갈 수 있는지가 중요하다.
검찰 수장으로서 더 크게 바라보고, 더 넓게 소통하면서 기수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것을 증명해주기를 기대한다.

이찬희 대한변호사협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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