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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금 인터뷰]카입 "공간에 놓인 사운드, 흘러가는 음악 아니라···"

뉴시스

입력 2019.07.05 06:02

수정 2019.07.05 14:10

<궁금, 궁금한 금요일> 전방위 작곡가 겸 사운드디자이너
카입
카입
【서울=뉴시스】이재훈 기자 = 작곡가 겸 사운드 디자이너 카입(Kayip·42·이우준)은 2000년대 벼락처럼 출현한 천재음악가다. 취미로 음악을 해오던 홍익대 도시공학과 재학 시절, 영화 ‘공공의 적’(2002) 사운드트랙을 작업하면서 주목 받았다.

이상은, 이승열, 정재형과 작업하고 윤상이 결성한 전자음악 프로젝트 ‘모:텟(Mo:tet)’에 참여하는 등 음악성으로 내로라하는 뮤지션들의 음반에 그의 이름이 빠지지 않았다. 당시 음악 좀 듣는다는 힙스터들 사이에 이름이 오르내렸다.

영국 버밍엄국립음악원을 졸업하고 왕립음악원 석사 과정에서 현대음악 작곡을 공부한 전방위 음악가다. 특히 1980년대를 풍미한 록밴드 ‘록시뮤직’ 출신 프로듀서 브라이언 이노에게 발탁된 일은 여전히 회자된다.
이노는 2009년 영국과학박물관에서 열린 아폴로 달 착륙 40주년을 기념 공연에서 자신의 대표작 ‘아폴로’를 현대음악 앙상블로 재편곡해 공연했는데, 편곡을 맡은 뮤지션이 바로 카입이다.

지금 카입의 작업 범위는 더 넓어졌다. 공연, 전시, 미디어아트 등 장르 불문이다. 6일까지 두산아트센터 스페이스111에서 공연하는 ‘두산인문극장 2019: 아파트’의 마지막 작품 ‘포스트 아파트’(연출 정영두)에도 그의 인장은 촘촘히 박혀 있다.

연극, 무용, 영상 등이 유기적이고 총체적으로 얽혀 있는 다원극이자 무대와 객석 구분이 없이 관객들이 곳곳을 돌아다니며 참여하는 ‘이머시브 공연’의 결정판인데, 카입의 사운드는 관객 저마다에게 안내자가 되고 이들이 움직이는 방향을 결정한다. 공연 중 안대를 착용하고 소리에 오롯이 집중하는 시간은, 아파트의 문화적 맥락과 역사를 압축해낸 이 공연에 방점을 찍는다.

카입은 “이번 다원극은 형식도, 주제도 층위가 여러 개가 있어요. 여기에서 현실의 서사를 담아내는 것이 매체들”이라면서 “소리가 매체의 특성을 잘 드러낼 수 있는 연결고리가 되고자 했습니다”고 말했다.

‘포스트 아파트’는 카입에게 최적화된 공연이다. 도시공학을 공부했으니, 블랙박스 시어터를 마음껏 활용한 공연장의 구조 이해도가 매우 높다.

앰비언트 음악 장르의 숨은 명반으로 통하는 ‘슬로 무브스(Slow Moves)’를 냈다는 것도 믿음을 준다. 앰비언트 뮤직은 의식적인 음악 감상에 목적을 두지 않고, 환경의 일부로서 자연스럽게 청취하게 되는 음악을 가리킨다. 주변의, 둘러싼이라는 뜻처럼 공간감을 조성하는 것이 특징이다

카입은 “앰비언트 뮤직의 기본적인 철학은 공간에 가구 또는 오브제처럼 놓여 있는 사운드에요. 음악은 시간성을 베이스로 삼는데, 공간을 베이스로 삼는 거죠. 시간을 만들어내는 리듬을 배제하고, 음색의 변주를 통해 머물러 있는 느낌을 주는데 건축적으로 매치되는 장르”라고 설명했다.

‘포스트 아파트’에는 유년 시절 누군가는 들었을 노래 ‘아파트마을’도 흘러나온다. 동요 같은 멜로디에 “문을 열면 이웃집 문 닫으면 우리집”이라는 회색지대 같은 노랫말의 조합은 묘한 뉘앙스를 풍긴다. 카입의 지인이 어릴 때 들었던 노래라며 추천해준 곡이다.

'포스트 아파트'
'포스트 아파트'
카입은 아파트를 둘러싼 다양한 소리를 추출하기 위해 작년 9월부터 상당량의 자료 조사를 했다. 그 가운데 기존 아파트에 대한 프레임에서 벗어나, 좀 더 넓은 시각에서 볼 수 있는 자료도 있었다.

1970년대 미국 아파트가 낡고 슬럼화돼 폭파된 사례가 보기다. 당시 아파트와 아파트 설립 계획의 문제처럼만 평가됐다. 하지만 아파트에 살던 백인 중산층이 교외로 나가는 등 생활 패턴의 변화, 즉 사회문화적으로 통합해서 생각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가 한때 공부한 도시공학도 이런 패턴의 학문이다. “아파트, 도시, 사람들이 복합적인 유기체라는 것을 깨달은 거죠. 그래서 예측하기 힘들고요”라고 짚었다.

일곱 살부터 아파트에서 살아왔고 지금도 아파트에 사는 카입은 이번 ‘포스트 아파트’ 작업에 참여한 후 터전의 달라진 분위기도 느꼈다. “그간 이웃과 접촉의 기회가 없었는데 앞집 할머니에 대해 관심을 갖는다거나 다른 사람이 들어올 수 있도록 현관의 문을 잡아주고 있는 것이 눈에 띈다거나 평소 감지하지 못하던 것들이 느껴졌다”며 웃었다.

카입은 고등학교 때부터 밴드, 컴퓨터 음악작업을 했다. 하지만 당시에는 자신이 음악을 업으로 삼을 것이라 생각을 하지 못했다. 음악은 자연스럽게 접했다. 컴퓨터에 관심이 많던 그는 PC통신이 활발하던 시절 게임 제작 동호회에서 활동했는데, 배경 음악을 만드는 것이 그의 몫이었다.

취미로 피아노 레슨도 받고 있던 터라 컴퓨터 프로그래밍으로 음악을 만드는 것은 비교적 수월했다. 최근 건축 비엔날레에서 도시를 돌아다니면서 건축물을 경험하는 게임 만드는 작업에도 참여했는데 “옛날 생각이 많이 났다”며 즐거워했다.

컴퓨터 음악의 선두주자이기도 한 카입은 기술이 음악 창작의 방식보다 배급방식에 큰 영향을 끼치고 있다고 봤다. 문제는 창작자 생존에 불리한 배급 방식이 구축돼 뛰어난 신인들이 음악 신에 계속 유입되지만 음악가로서 오래 생명력을 유지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포스트 아파트'
'포스트 아파트'
카입은 “과거와 비교해 3집 이상 내는 뮤지션들 숫자를 조사해보면, 지금은 현저히 떨어질 거예요. 레코딩으로 수익을 내기가 불가능하고, 공연의 기회도 현저히 늘어나지 않는 상황에서 창작자들은 살아가기 힘든 구조”라고 본다.

컴퓨터 음악을 하던 카입이 영국 유학에서 클래식음악을 공부한 이유는 소통 방식 때문이다. 주로 홀로 작업하는 컴퓨터음악은 언제 끝을 내야 하는지 판단하기 힘들다. 혼자서 결정해야 하니, 선택의 수가 많아지고 쉽게 끝맺음을 할 수 없다. 반면 클래식음악은 연주자들이 구현해내야 하는만큼, 이들과 소통이 중요하다.

2013년 이경성 연출의 ‘서울연습-모델, 하우스’ 작곡을 통해 입문한 연극계 역시 그에게 소통하는 즐거움을 알게 해줬다. 연극 ‘피와 씨앗’, 국립창극단 창극 ‘시’ 등도 마찬가지다.

“공연은 배우, 객석에 따라 날마다 분위기가 다르니 음악 컨트롤이 쉽지 않아요. 만나는 배우, 공간에 따라 달라지죠. 그런 것들이 배움과 재미를 줍니다.”

카입은 사운드와 소리의 사회적인 구실에 관심도 많다. 2015년 보험회사와 손잡고 청각 장애인의 목소리를 복원하는 프로젝트를 했고, 이후에는 수화번역디바이스에 대한 R&D를 하고 있다. 시각장애인이 마라톤에 쉽게 참여할 수 있도록 소리로 길의 방향을 알려주는 프로젝트도 작업 중이다.

완벽하게 컨트롤, 촘촘히 구조를 쌓는 방식에 미련을 버렸다는 카입은 작업방식에 근본적인 변화를 꾀하고 있다. “꼼꼼하게 모든 것을 설계하는 건축가보다, 다양한 것들이 자연스럽게 어우러지게 하는 정원사가 됐다”는 것이다.

예명인 카입은 터키어로 ‘실종’을 뜻한다. 1999년 빚어진 참극인 터키 대지진 당시 기사를 읽다가 실종된 딸을 찾고 있는 아버지의 모습이 담긴 사진을 보고 지었다.
아버지의 눈빛은 건조했지만 슬픔에 잠겨 있기보다는 딸을 되찾겠다는 의지를 담고 있었다. “그 정서적인 기운을 가져오고 싶었어요.”

카입이 사용하는 실종의 어감에는, 어둠 속에서도 뭉근하게 피어오르는 희망이 담겨 있다.
카입은 음악이 단순한 물리적인 신호가 아닌, 사람을 연결시키는 마음이라는 것을 깨닫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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