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도에서]

통상분쟁 장기전은 공멸이다

수출로 먹고사는 한국 경제에서 일본은 싫든 좋든 숙명적으로 떼려야 뗄 수 없는 존재다. 기점은 1965년 한일청구권협정이다. 당시 일본은 한국 정부에 무상 3억달러, 장기저리 정부차관 2억달러, 상업차관 3억달러 등을 각각 지원했다. 단 조건이 따랐다. 국가기록원에 따르면 청구권 자금은 일본상품 구입에 한정됐다. 상업차관 역시 일본자재 구입을 부대조건으로 달았다. 이는 한국의 대일수입을 지속적으로 증대시키는 효과로 이어졌다. 일본에서 부품소재를 수입해 중국, 미국 등에 수출하는 산업구조가 고착화됐고 수출이 늘어날수록 대일 수입도 크게 증가했다. 일본 시각에서 한국이 중개무역국에 가까운 것도 이 때문이다.

다만 한국은 대량생산품목으로 규모의 경제를 지향해 가공기술과 숙련이 필요한 중간재, 자본재 등의 발전이 상대적으로 뒤떨어졌다. 이렇다보니 한·일 국교정상화 이후 대일 무역수지는 단 한 번도 흑자를 내지 못했다. 번 돈의 상당부분을 일본에 갖다 바치는 이른바 '가마우지 경제'다. 50년 이상 지난 현재도 일본이 수출규제를 통해 우리의 급소를 찌를 수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사이 한국의 무역의존도는 상당히 높아졌다. 한국무역협회와 통계청에 따르면 2015년 기준 한국의 국내총생산(GDP) 대비 무역의존도는 69.7%로 주요 20개국(G20) 국가 중 독일(70.9%)에 이어 두번째로 높다. 한일청구권협정 이전인 1964년 16.7%와 비교하면 4배를 웃돈다. 지난해에는 70%를 넘어섰다. 일본(30.9%)에 비하면 두배가 넘는 비중이다. 그만큼 우리나라가 일본보다 외풍에 더 취약한 구조다.

한·일 간 무역비중도 무시할 수 없다. 일본관세협회 집계를 보면 지난해 일본 전체 수출에서 차지하는 한국(5조7925억엔) 비중은 7.1%로 3위다. 수입에선 한국(3조5504억엔) 비중이 4.3%로 5위다. 우리나라 역시 일본은 주요 교역국이다. 전체 수출에서 차지하는 일본 비중은 5.3%로 5위다. 수입에선 일본 비중이 9.6%로 중국, 미국 다음으로 세번째다.

사실 우리에겐 부품소재 분야에서 탈일본 기회가 있었다. 정부의 소재부품사업 육성책이 본격화된 1999년 '부품산업발전전략' 이후 자동차 등 일부 산업에선 소기의 성과를 거뒀지만 대부분 큰 진전을 보지 못했다. 이유는 크게 두 가지다. 정부지원이 단기 상용화가 가능한 중·저급 기술 위주의 범용품목에 집중돼 원천기술 확보에 실패했다. 또한 새로운 부품소재를 개발해도 신뢰성 문제로 국내에서도 수요를 기피하는 등 장기적인 수요와 사업화 지원이 미흡해 부품소재 기업들은 독자적 자생력을 갖추지 못했다. 20년간 성과도 초라한데 단기간 부품 국산화가 가능할지 의구심이 꾸준히 제기되는 이유다. 특히 당장 기업들엔 발등의 불이다.

강제징용 피해자들의 배상 판결을 둘러싼 외교갈등에서 비화된 한·일 통상분쟁이 '장기전'으로 치닫는 양상이다. 한국 경제의 태생적 한계와 세계 최고 수준인 무역의존도, 부품소재 국산화 실기 등을 감안하면 우리에게 유리할 게 없어 보인다. 일본도 부품소재 및 반도체 수요 산업 전반에 타격이 불가피해 승자 없는 공멸게임이 될 게 자명하다. 무역은 국제정치다. 한·일 경제협력 논의가 사실상 3년째 중단된 것도 이번 사태와 무관치 않다.
더구나 이성보다 감성에 치우치면 정치와 경제가 모두 꼬일 수밖에 없다. 분명한 건 악화일로인 한·일관계의 국면전환 없이는 기업도, 경제도 미래를 논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실마리를 풀어나는 건 기업이 아니라 정치의 몫이다.

winwin@fnnews.com 오승범 산업부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