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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의나루] 비밀을 지켜주지 않는 나라

박인옥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19.07.23 17:44

수정 2019.07.23 17:44

[여의나루] 비밀을 지켜주지 않는 나라
성직자는 불안한 인간의 영혼을 치유한다. 변호사 역시 세상사에 상처받은 영혼을 보듬어 주는 역할을 한다. 돈만 많이 주면 악마도 변론한다는 변호사를 감히 성직자와 비교하다니 누군가는 억지라고 항변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고해성사를 위해 사제 앞에 앉은 신자처럼, 변호사를 찾아 온 의뢰인 역시 절박함 속에서 보호받고자 자신의 모든 것을 고백한다.

변호사로서 의뢰인과 만나면 항상 "이기고 싶다면 사실대로 말해 달라. 그래야 당신을 위해 제대로 변론할 수 있다"는 말로 상담을 시작한다. 어떤 직업이든지 간에 상대방과의 신뢰가 중요하지만 사제와 신자, 변호사와 의뢰인 간에는 신뢰가 직업 자체의 근간을 이룬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실대로 말하면 억울함을 풀어줄 거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불안한 의뢰인은 변호사에게 수시로 연락한다.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발달로 온갖 문서와 자료를 휴대폰으로 주고받으며 법률자문을 구한다. 휴대폰은 마치 사제와 신자가 마주 앉은 고해성사 장소처럼 모든 비밀이 공유되는 변호사와 의뢰인 둘만의 공간이 된다. 그런데 우리 현실은 고해성사 자리에 폐쇄회로TV(CCTV)를 매달아 놓는 것처럼 변호사와 의뢰인의 비밀이 지켜지지 못하고 있다.

대한변협에서는 지난 4일 '의뢰인과 변호사 간의 비밀유지권 침해 실태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내용은 가히 충격적이다. 현재 수사기관은 변호사 사무실이나 기업 법무팀의 컴퓨터나 휴대폰을 압수수색하는 방법으로 관련 증거를 찾고자 한다. 원하는 증거가 없으면 가져간 컴퓨터나 휴대폰에서 발견된 별건 수사에 대한 압박으로 자백을 받아내고 있다.

대형로펌이나 대기업조차도 이런 압수수색에 무력하게 뚫리는데 규모가 작은 변호사 사무실이나 중소기업은 그야말로 무방비 상태에 놓여 있는 것이다. 변호사와 주고받은 자료를 수사기관에서 쉽게 압수수색한 후 이를 재판에서 불리한 증거로 사용한다면 결국 헌법상 보장되는 변호인의 조력을 받을 권리 자체를 붕괴시키는 결과를 낳게 된다.

우리 헌법 제12조 제4항에서 규정하고 있는 '변호인의 조력을 받을 권리'의 핵심은 의뢰인이 변호사와 충실한 상담을 통해 자신을 보호받는 것이다. 수사의 필요성이 있다 하더라도 국민의 헌법상 기본권보다 절대 우선될 수는 없다. 수사가 다소 어려워지더라도 헌법적 가치나 제도를 훼손해서는 안된다.

법원 역시 자신들이 연관된 사건에서는 수천자로 기각사유를 밝히며 그렇게 신중하게 발부하던 압수수색영장을 일반 국민의 사건에서는 너무나 쉽게 발부하고 있다. 그나마 법원 통제도 받지 않고 임의제출이라는 형식으로 변호인과 의뢰인의 상담자료를 가져가는 국세청, 금융감독원, 공정거래위원회 등 권력기관이 줄지어 서있다.

의뢰인의 비밀유지권은 선진국 중 유독 우리나라와 일본에만 없다.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의 배상 문제가 뜨겁지만, 아직도 우리는 법·제도상으로는 일제의 잔재 속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글로벌 법률시장에서 국내 로펌과 경쟁하는 외국 로펌들이 "한국 로펌에 법률자문을 하면 수사기관의 압수수색을 통해 정보가 그대로 노출된다"는 말을 공공연하게 하면서 국내 로펌의 법률자문을 가로채고 있다고 한다.
글로벌 법률시장으로 도약하려는 국내 로펌들을 국가가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발목을 잡아서야 되겠는가. 의뢰인의 비밀유지권을 보장하는 조속한 입법이 절실하다.

이찬희 대한변호사협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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