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칼럼 기자수첩

[기자수첩] 융통성과 원칙, 그리고 추경

권승현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19.07.25 17:50

수정 2019.07.25 17:59

[기자수첩] 융통성과 원칙, 그리고 추경

우리 사회에선 대개 융통성과 원칙(절차)이 충돌하게 되면 융통성이 우선시된다. 그러다 보니 융통성이 없는 사람이란 말은 앞뒤가 꽉 막힌 사람이란 말과 동일한 의미로 쓰인다.

물론 원칙 앞에 융통성은 뼈도 추리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법원이 대표적이다. 아무리 천인공노할 범죄 앞에서도, 수천만명이 넘는 국민 청원 앞에서도 법원은 원칙 내에서만 판결을 내려야 한다. 이유는 '신뢰' 때문이다.
그 어떤 상황에서도 동일한 절차와 질서가 적용된다는 '신뢰'를 법원은 심어줘야 한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이야기를 이처럼 늘어놓는 이유는 최근 추경 심의 과정을 짚고 싶어서다.

일본의 수출규제 조치가 불거지자 정부는 국회에서 심의 중인 추경안에 '일본 조치 대응예산'을 끼워넣었다. 홍남기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상황이 엄중한 만큼 추가 (예산)소요를 추경 심의 때 증액하는 것을 고려해달라"며 국회에 '융통성'을 요구했다.

하지만 야당은 '절차'가 우선이라고 맞섰다. 야당 의원들은 정부가 추경안을 제출한 이후에 부득이한 이유로 수정이 필요할 경우 국가재정법 제35조에 따라 수정예산안을 제출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여당 의원들은 사안이 위중한 만큼 신속하게 정부에 협조해야 한다고 반박했다.

일본의 수출규제 조치는 그 무엇보다 융통성을 요하는 사안인 것은 맞다. 피해 규모가 구체화되지 않은 터라 정확한 추산은 어렵지만 한국 반도체 생산이 10% 줄면 국내총생산(GDP)이 0.4% 감소할 수 있다는 예측도 나왔다.

문제는 정부와 의원안으로 제시된 대안에 있다. 정부와 국회 간 '신뢰'를 등한시할 만큼의 융통성을 요구하고 있다는 판단이 들지 않는다. 일례로 정부는 소재·부품 연구개발(R&D)에 2500억원 증액이 필요하다고 요구했다. R&D는 장기적 호흡에서 진행된다. 정부가 융통성만 강요하기엔 그 근거가 빈약하다. 또한 정부와 여당은 목적예비비 용도에 '일본의 수출규제 대응'을 추가하고 3000억원 증액하는 방안도 추진했다. 어떻게 쓸지 모르겠으나 어떤 위험이 닥칠지 모르니 일단 비상금을 늘려놓자는 의미다.


야당 측은 "정부의 긴급 예산편성 규모가 당초 제시했던 1200억원에서 8000억원까지 '고무줄 추산'이 이뤄지고 있다"고 지적한다. 실제로 취재 과정에서 상임위별 증액안을 취합할 때마다 시시각각 달라지는 금액을 확인할 수 있었다.


"정치적 이유로 '보여주기식' 증액을 하는 것으로 보인다"는 재정전문가들의 지적도 나왔다. 정말 정치적 이유로 예산권을 가진 국회에 '융통성'을 요구한 거라면 굳건히 보존돼야 할 국회·정부 간 신뢰는 어떻게 될까.

ktop@fnnews.com 권승현 경제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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