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본영 칼럼]

구한말의 비극은 한번으로 족하다

죽창가만으론 극일 못해
무역전쟁이든 담판이든 정부가 결단해 해결해야

지난주 동해에서 중국 전투기가 우리 방공식별구역에 진입하고, 러시아기는 독도 영공을 침범했다. 연합초계훈련에 나선 중·러와 우리 전투기 30여기가 독도 영공 안팎에서 뒤엉켰다. 그 와중에 일본이 자국 영토를 침범했다며 한·러에 동시 항의하는 황당한 일도 벌어졌다. 한반도에서 열강이 각축하던 구한말의 데자뷔를 느끼게 된다.

1905년 9월 러일전쟁 강화를 중재한 미국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의 딸 앨리스가 서울에 왔다. 조정은 이 '미국 공주'를 극진히 환대했다. 황실 가마에 태워 덕수궁에 재우고 떠날 때는 '어진'(고종의 사진)을 선물했다. 갑신정변 때 청의 군대에 구출됐고, 을미사변 시 러시아공사관으로 피신했던 고종이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이기자 미국의 도움을 절박하게 기대한 셈이다.

그러나 앨리스는 냉담했다. "황제다운 존재감은 거의 없었고, 애처롭고 둔감한 모습이었다"는 반응이었다. 고종은 구원의 동아줄인 양 매달린 미국이 일본과 필리핀, 한반도에서 각각 지배의 우선권을 갖는 밀약을 했음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이 가쓰라·태프트 밀약은 앨리스 일행이 서울에 오기 두 달 전 일본에서 체결됐다.

다시 한반도로 러·중·일발 난기류가 밀려왔다. 그중에서도 일본발 경제보복 공세는 퍼펙트스톰급이다. 반도체 핵심소재 수출제한에 이어 안보상 우호국가 명단인 화이트리스트에서 한국을 빼려 하고 있어서다. 수출에 의존하는 우리 기업들엔 발등의 불이다. 국민 다수는 강제징용 배상 등 과거사를 빌미로 한 아베 정부의 엉뚱한 경제보복이 부당하다고 본다. 그러니 일본 맥주 안 마시려 하는 건 당연하다. 아무리 가성비가 높은들 유니클로에서 파는 옷을 누가 사고 싶겠는가.

그러나 '의병·죽창'을 외칠 뿐 정작 정부의 뾰족한 대책이 안 보이니 걱정이다. 국민은 얼마든지 의병 역할을 할 용의가 있지만, 궁극적 해결책은 될 수 없어서다. 1894년 우금치에서 관군 대신 일제와 싸운 동학군 2만6000명이 전사했다. 일본군은 단 한 명 죽었다. 조정이 최소한의 자위력도 키우지 못한 채 외교적 통찰력조차 없어 민초들이 희생된 구한말의 참상이었다.

물론 지금 우리 국력은 구한말과는 다르다. 조국 전 청와대 민정수석이 말한 '죽창가' 소리 요란했던 대한제국의 재정규모는 일본의 330분의 1이었다. 1965년 한·일 수교 이후 열심히 추격했지만 재정규모 6분의 1 수준으로 아직은 열세다. 글로벌 분업구조에서 무역전쟁은 피차 손해지만, 경제적 맷집이 약한 쪽이 더 큰 내상을 입는다. 불매운동이 길어지면 일본도 출혈이 있겠지만, 우리 서민경제도 나빠질 게 뻔하다.

스포츠 경기에선 속된 말로 '졌잘싸'(졌지만 잘 싸웠다)도 뜻깊다. 그러나 국가 간 다툼은 다르다. 루쉰의 '아Q정전'에서처럼 도덕적 우위로 자위하는 '정신 승리'가 무슨 소용이 있겠나. 경제보복전은 장기화하고, 징용배상금도 받아내지 못하면서 우리 경제만 골병든다면 최악의 시나리오다.


무역전쟁을 치르든, 협상하든 정부가 전면에 나설 때다. 징용배상 문제 등을 놓고 국제사법재판소에 가는 한이 있더라도 일본과 끝장을 보겠다는 의지가 있는지부터 자문해 보라. 그렇지 않다면 외교적 담판에 나서야 한다. 난중일기를 보면 귀양살이에서 풀려난 이순신이 명량해전에 앞서 "백성들은 즉시 육지로 올라가라"고 명하는 대목이 나온다. 남은 12척으로 관군이 맨 앞에 나서겠다면서….

kby777@fnnews.com 구본영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