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칼럼

[곽인찬 칼럼]징비록을 읽읍시다

곽인찬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19.08.12 17:15

수정 2019.08.12 17:15

서애가 쓴 임진란 반성문
이순신은 빈틈 없는 장수
함부로 싸우는 법이 없어
[곽인찬 칼럼]징비록을 읽읍시다
서애 유성룡의 '징비록'을 다시 읽었다. 임진왜란 6년(1592~1598년)을 뒤돌아본 반성문이다. "뒷날에는 이런 낭패스러운 일이 없도록 미리 조심하자"는 뜻을 담았다. 일본과 다시 맞붙은 지금, '징비록'을 훑어보는 것은 후손된 자의 도리다. 역시 하이라이트는 이순신이다. 깜짝 놀랄 대목이 많다.
'징비록' 속 이순신은 내가 겉핥기로 아는 이순신이 아니다. 용맹하다. 그러나 무모하지 않다. 한마디로 그는 용의주도한 사람이다. 몇가지 사례를 보자.

정유재란이 일어난 해(1597년), 이순신이 옥에 갇힌다. 나가서 싸우라는 임금(선조)의 명을 따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생각해 보라. 지금 어떤 장군이 감히 대통령의 명을 어기고 전투를 거부할 수 있을까. 조선 조정이 난리가 난 것은 당연하다. 한 유생은 "이순신의 목을 치라"는 상소를 올렸다. 그나마 선조가 이순신의 죄를 백의종군으로 감형한 것이 다행이다.

이순신은 왜 싸우지 않았을까. 당시 일본군 장수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아래 요시라라는 모사꾼이 있었다. 요시라는 우리편 장수를 찾아가 "아무날에 일본 수군이 바다를 건너올 테니 조선 수군이 기다리고 있다가 치면 능히 이길 수 있다"고 꼬드긴다. 요시라질이라는 말이 여기서 나왔다. 이간질이다. 우리편 장수는 이 정보를 부리나케 조정에 알렸다. 임금은 이순신더러 나가 싸우라고 명한다. 이순신은 이를 거짓정보로 의심했다. 그래서 뭉그적댔다. 손자병법은 "싸울지 말지 그 여부를 아는 자가 승리한다"고 했다. 이순신은 병법을 아는 장수였다.

명나라 수군 제독 진린을 대하는 이순신의 태도는 더 놀랍다. 진린은 마치 상전이라도 되는 양 난폭하게 굴었다. 그래서 서애는 "진린 때문에 장차 이순신이 싸움에서 지겠구나"하고 걱정했다. 웬걸, 이순신은 진린과 완벽한 콤비를 이룬다. 진린이 온다는 소식을 듣자 이순신은 진수성찬을 차렸다. 왜군 목을 베어와서는 죄다 진린에게 바쳤다. 감복한 진린은 그 뒤 무슨 일을 하든 먼저 이순신부터 찾았다. 임진왜란의 대미를 장식한 노량해전(1598년)도 조·명 연합수군이 왜적을 무찌른 전투다. 슬프다, 바로 이 해전에서 이순신은 목숨을 조국에 바친다.

원래 이순신은 나긋나긋한 인물이 아니다. 무과에 붙고 첫 벼슬을 할 때 병조판서가 제 서녀를 첩으로 주려 했다. 그러자 이순신은 "어찌 권세 있는 집안에 기대어 출세하기를 바라겠는가"하고 단박에 거절했다. 이렇듯 심지가 굳은 인물이 진린 앞에서는 기꺼이 몸을 낮췄다. 제 일신보다 나라를 먼저 생각하는 마음이 없었다면 어찌 그러했겠는가.

일본 아베 정권이 과거사를 핑계로 경제전쟁 시비를 걸었다. 마땅히 힘을 모아 맞서야 한다. 하지만 감정을 앞세워 무턱대고 싸우진 말자. 이순신은 싸우기 전에 군량미를 확보하고, 장정을 모으고, 대포를 주조하고, 거북선을 만들었다. 그런 뒤에도 싸움터에 나설 땐 빈틈이 없는지 살피고 또 살폈다. '12척'도 이순신 정신이지만 용의주도함 역시 우리가 본받아야 할 충무공 정신이다. 이순신은 죽창 들고 조총에 맞설 사람이 아니다.


진린은 조선 임금에게 글을 올려 "통제사(이순신)는 경천위지(經天緯地)의 재주가 있다"고 칭송했다. 하늘과 땅, 곧 세상을 다스릴 만한 능력이 있다는 뜻이다.
더 많은 사람이 '징비록'을 읽고 영웅 이순신의 참모습을 알면 좋겠다.

paulk@fnnews.com 곽인찬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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