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코리아 R&D, 패러독스인가 인과응보인가

과학기술은 미래를 향하지만 과거를 간직하는 데 쓰이기도 한다. 대표적인 것이 버추얼 헤리티지 기술로 문화유산을 3차원 정보로 변환·저장·관리해 활용하는 분야다.

필자는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베트남 후에 왕성을 디지털로 복원하는 프로젝트에 참여했었다. 무척이나 덥고 습한 베트남 날씨에 힘겨웠지만, 디지털 복원 데이터로 만든 가상투어 영상은 세계적 여행 가이드북인 론리 플래닛 베트남 편에 '꼭 봐야 할 영상'으로 소개되기도 했다. 6개월 만에 정부 지원 개발도상국 원조사업을 통해 이룬 성과였다. 짧은 기간에 만들어진 성과라 완성도를 높여야 했고, 학술적 차원에서도 추가적인 연구가 필요했다. 추가지원을 요청했지만 동일한 프로젝트에는 계속해서 지원할 수 없다는 것이 우리 정부의 방침이었다. 반면 일본 연구팀은 동일한 프로젝트를 10년 넘게 진행해오며 현지인들의 신뢰는 물론 기술과 데이터를 쌓아가고 있었다. 최근 일본의 정치적 행보는 실망스럽지만 일본을 과학기술 강국으로 만든 것은 장기간 꾸준히 연구할 수 있는 문화와 시스템이 갖춰져 있기 때문이다.

개인 차원에서 한 분야의 전문가가 된다는 것은 적지 않은 시간과 노력을 투여해야 하는 헌신과도 같은 것이다. 이를 국가 차원으로 확대해서 보면 한 분야의 전문가를 양성하는 일은 적지 않은 시간과 지속적이고 안정적인 투자가 뒷받침돼야 가능하다. 단기간의 투자로 당장 성과를 얻을 수는 있겠지만 장기적으로 더 큰 성과를 낼 전문가를 양성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많은 과학기술 분야 전문가들이 '축적의 시간'을 이야기하는 이유다.

안타깝게도 우리나라의 R&D는 단기적 투자를 통해 당장의 성과를 얻는 방식으로 이뤄지고 있다. 그러다보니 자신의 전문분야를 깊게 파고들 수 없고 과제 수행을 위한 연구만 하게 된다. 과제 성공률 98%의 신화 아닌 신화가 이런 R&D 시스템에 의해 나온 것이다.

정부 R&D 사업을 지적할 때 '코리아 R&D 패러독스'라는 말이 흔히 쓰인다. 투자는 많이 하지만 성과가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필자는 '코리아 R&D 인과응보'라 생각한다. 연구주제는 연구현장에서 자율적으로 나오는 것이 자연스럽지만 우리 R&D 시스템은 정부 관료들에 의해 연구과제가 나오고 부처별로 나눠지고 소형화된다.

선진국의 기술을 추격하던 과거에는 이런 시스템이 잘 작동했다. 하지만 이제 우리의 국가 경쟁력이 높아진 만큼 과학기술 경쟁력도 높이려면 추격을 넘어서 앞서 나가기 위한 기초원천연구에 집중해야 한다. 문제는 현재의 R&D 시스템은 장기간 꾸준히 연구해야하는 기초원천연구에 적합하지 않다는 것이다.

과학기술 강국, 퍼스트무버로 도약하기 위해서는 연구문화, 연구체계에도 혁신적 변화가 필요하다. 과학기술 분야 정부출연연구기관을 대표하고 대변해야 하는 국가과학기술연구회 이사장으로서 그동안 이 문제에 적극적으로 대처하지 못한 것에 반성한다.
늦었다고 생각할 때는 늦었다는 요즘 말처럼 더 늦기 전에 지금이라도 이 시스템을 바로잡을 수 있도록 함께 노력해야 한다.

구호만 외친다고 4차 산업혁명이 이뤄지지 않는다. 연구문화에 획기적 변화를 가져오는 것이 진정한 4차 산업혁명이자 혁신을 이루는 길이다.

원광연 국가과학기술연구회 이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