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일만 야구선임기자의 핀치히터]

사와무라에 가려진 재일동포 투수 김경홍

지난 6일 향년 86세로 별세
통산 400승 대기록 남겼지만
한·일서 큰 사랑은 못 받아

요미우리 올스타전에 출전한 가네다 마사이치/사진=fnDB
그를 떠올리면 세 가지 일화가 생각난다. 가네다 마사이치(金田正一·한국명 김경홍·사진)는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17살에 프로(야쿠르트 스왈로스)에 입단했다. 첫 해 그를 상대한 한신의 타자는 주심에게 강력한 항의를 했다.

공이 너무 빠르다. 투수와 홈플레이트 거리가 너무 가깝다. 그러니 한 번 재보자. 말도 안 되는 주장이었다. 실제로 주심은 경기를 중단하고 줄자로 거리를 계측했다. 정확히 18.44m였다.

1958년 대학야구 스타였던 나가시마 시게오가 요미우미에 입단했다. 나마시마는 데뷔전을 앞두고 "가네다의 공을 부셔버리고 싶다"며 도발했다. 가네다는 버럭 화를 냈다고 한다. 나가시마는 데뷔전서 가네다에게 4연속 삼진을 당했다.

이듬해 요미우리에 입단한 신인 왕정치(오 사다하루)도 가네다와의 첫 만남에서 4연속 삼진을 당했다. 가네다는 한다면 하는 투수였다. 1957년 그는 주니치를 상대로 퍼펙트게임을 달성했다.

가네다는 경기 도중 복통을 일으켰다. 빨리 경기를 끝내고 싶었다. 9회 1사 후 주니치 감독이 볼 판정에 불만을 품고 오래 동안 항의를 했다. 가네다는 발끈했다. 그는 동료에게 "볼 6개로 끝내 버릴 게"라고 말했다.

퍼펙트게임까지 남은 아웃카운트는 두 개. 그는 연속 삼구 삼진으로 경기를 끝냈다. 가네다는 14년 연속 20승 이상을 달성했다. 통산 400승은 절대 깨어질 수 없는 일본 프로야구 기록으로 남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인들은 최고 투수하면 사와무라 에이지부터 떠올린다. 가네다는 길고 강렬했다. 사와무라는 짧고 화려했다. 벚꽃을 닮은 사와무라의 인생 때문일까, 아니면 재일동포라는 가네다의 출생 탓일까. 일본 프로야구는 1947년 매년 가장 뛰어난 투수에게 사와무라 상을 수상하고 있다.

사와무라는 가네다와 마찬가지로 고교를 중퇴하고 프로(요미우리)에 입단했다. 고교시절 그는 미일 올스타전에 출전했다. 베이브 루스, 루 게릭, 지미 폭스 등 대타자들이 즐비한 타선이었다.

4회부터 등판한 사무와라는 5이닝 1실점으로 호투했다. 루 게릭에게 홈런을 허용했지만 9개의 탈삼진을 잡아냈다. 1936년엔 일본 프로야구 최초로 노히트노런을 기록했다. 8년간 요미우리 투수로 63승을 남겼다.

1937년 사와무라는 33승 10패로 투수 3관왕, MVP에 등극했다. 이듬해 그는 육군에 입대했다. 중일전쟁에 참전한 사와무라는 수류탄을 던지다 어깨 부상을 당했다. 왼 팔에 총상을 입기도 했다.

사와무라는 1940년 리그에 복귀했다. 부상 후유증으로 강속구 투수에서 사이드암으로 변신했다. 그 해 세 번째 노히트노런을 달성했다. 하지만 7승 1패의 평범한 성적에 그쳤다. 결국 1943년 요미우리에서 방출 당했다. 사와무라는 다시 입대했다. 1944년 야쿠시마 전투에서 타고 있던 전함이 침몰돼 전사했다.

김경홍씨가 지난 6일 향년 86세로 타계했다. 그는 장훈과 달리 일본으로 귀화했다.
그런 탓에 한국인의 큰 사랑을 받지 못했다. 일본인들에겐 사와무라보다 뒤편이다. 삼가 그의 명복을 빈다.

texan509@fnnews.com 성일만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