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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n스트리트] 홍콩누아르

정순민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19.10.14 17:35

수정 2019.10.14 17:51

왕가위 감독의 '중경삼림'은 홍콩 반환 직전인 1994년 개봉됐다. 이 영화의 여주인공은 스튜어디스가 되어 캘리포니아로 떠나길 꿈꾼다. 작은 패스트푸드점에서 일하는 그녀는 매일 '마마스 앤드 파파스'의 노래 '캘리포니아 드리밍'을 크게 틀어놓는다. 한편 사복경찰인 남자 주인공은 유통기한이 5월 1일인 파인애플 통조림을 사 모은다. 그날까지 헤어진 연인이 돌아오지 않으면 그녀를 잊기로 마음먹는다. 그러면서 "만약 사랑에도 유통기한이 있다면 1만년쯤 됐으면 좋겠다"고 중얼거린다.
째깍째깍 다가오는 홍콩의 중국 반환(1997년)에 대한 불안이 영화에 투영됐다는 해석이 가능한 대목이다.

1984년 홍콩반환협정 체결 직후부터 10여년의 기간이 이른바 홍콩누아르 전성시대라는 사실은 얄궂다. 성룡으로 대표되는 경쾌한 리듬의 무술영화를 밀어내고 음울한 정조의 갱영화가 쏟아져나온 것이 바로 이 시기다. 주윤발을 스타덤에 올려놓은 '영웅본색'을 비롯해 '첩혈쌍웅' '아비정전' '천장지구' 같은 영화들이다. 특히 1990년 개봉한 오우삼 감독의 '첩혈가두'는 '우리 그냥 다 죽자'는 절망적 분위기를 가감없이 드러내는데, 이는 한 해 전 발생한 톈안먼사태에 대한 홍콩인들의 극도의 불안감이 반영된 결과라는 분석도 있다.

홍콩이 중국에 반환된 직후 나온 '무간도'나 2006년작 '상성(傷城)'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홍콩누아르의 부활이라는 찬사를 받은 '무간도'는 신분을 감추고 조폭과 경찰로 위장한 주인공들을 통해 정체성 혼란에 빠진 홍콩의 모습을 은유한다. 또 '무간도' 시리즈로 이름을 날린 유위강·맥조휘 감독의 또 다른 작품인 '상성'은 '상처받은 도시'라는 제목에서 그대로 드러나듯이 반환 이후의 홍콩을 우울하게 스케치한다.


얼마 전 '영웅본색'의 주인공 주윤발이 홍콩 시위대에 합류해 화제를 모았다. 주윤발이 홍콩 정부에 대한 입장을 공개적으로 밝힌 건 아니지만 영화 속 영웅이 스크린 밖으로 나왔다는 사실만으로도 홍콩 시민들은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반중(反中) 성향의 홍콩 매체들이 이런 주윤발을 '진정한 따거(맏형)'라고 치켜세우는 것도 지나친 일은 아닌 듯하다.

jsm64@fnnews.com 정순민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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