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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n논단] 일, 여가 그리고 생산성

김충제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19.10.24 17:06

수정 2019.10.24 17:06

[fn논단] 일, 여가 그리고 생산성

노동공급은 임금상승에 비례해 증가한다. 그런데 임금이 어느 수준을 넘어서면 임금이 증가해도 노동공급은 상응해서 늘지 않는다. 여가를 더 중시하는 성향이 나타나 노동은 열등재가 되기 때문이다. 일과 여가의 균형화를 추구하는 워라밸(work & life balance) 움직임은 소득이 일정 수준을 넘어서면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현상이다.

그런데 '주 52시간 근무'가 법률로서 강제 실시됐다. 장시간 근로에서 벗어나 일과 가정을 양립시켜 인간다운 삶을 추구하자는 취지다.
이에 따라 여가산업의 활성화도 기대된다. 더욱이 근로시간 단축이 일자리 나누기로 이어지면 새로운 고용창출도 가능하다.

'주 52시간제'의 경제적 비용부담은 크다. 산업현장이 기존의 주 68시간에서 16시간이나 단축된 제도 변경에 적응할 준비가 부족하다. 근무시간의 단축에만 초점을 둬 일하는 방식의 혁신과 생산성 향상은 제대로 검토하지 않았다. 업종별·직무별 특성 고려도 미흡하다. 신기술과 신제품 관련 연구개발이나 전문직종의 경우 업무 차질이 불가피하다. 고용노동부가 최근 50~299인 기업 1300개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10곳 중 4곳은 아직 주 52시간 대응체계를 갖추지 못했다.

일터에 노사자율 재량권을 줘야 한다. 근로시간 감축에 따른 근로자의 소득 감소나 생활임금 확보난이 염려된다. 신규 고용창출효과도 높지 않다. 경기하강에 조업시간은 이미 줄어들었고, 한시적 부족인력은 외주용역으로 처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최저임금 인상, 비정규직의 정규직화 등 핵심 근로조건의 변화가 동시에 추진돼 기업의 흡수역량은 한계에 달했다.

일터의 혁신은 불가피해졌다. 유연근무제도는 대안이 될 수 없다. '선택적' 또는 '탄력적' 근로시간제 등은 인력활용의 효율성을 다소 높일 뿐이다. 산업생태계의 변화에 따라 양적인 일은 줄어들고 질적인 일은 늘어나는 추세다. IT나 AI 기술의 활용도가 급속히 증가하고 있기 때문이다. 단순반복적인 업무를 기계가 대신하고 근무시간에 구애받지 않는 창의적 업무는 확대된다. 일하는 방식은 변해야 한다.

혁신은 추진 방식에 따라 그 효과는 천차만별이다. 한 TV광고에서 회사의 책임자가 혁신하라고 고압적으로 훈계하자 어리둥절해하는 직원들 모습과, 작업장의 면모를 일신해 협업이나 창의적인 업무가 자연스레 이뤄지는 모습을 대별해 보여줬다. 일터의 패러다임 변화는 말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짧아진 근로시간과 높은 생산성이 결합되도록 업무 생태계를 과학화해야 한다.

일터 혁신은 일의 리디자인에서 출발해야 한다. 우리나라 조직은 너무 많은 '의전'을 요구한다. 힘과 자원을 낭비하는 업무행태에서 벗어나, 일의 본질을 부가가치 창출에 두어야 한다. 업무 조직과 회의체를 재설계해 업무의 흐름이 부가가치를 확대재생산하도록 새롭게 디자인돼야 한다.
정형화된 일일수록 하위직에 위임하고 상위직은 혁신에 치중해야 한다. 예측가능하고 객관적 평가가 쉽게 일과 프로세스를 잘 디자인해야 미래가 열린다.
인공지능사회는 시스템 경쟁력을 다투는 시대다.

정순원 전 금융통화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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