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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n논단] 이발소가 필요해

김충제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19.11.05 17:01

수정 2019.11.05 17:01

[fn논단] 이발소가 필요해
구보PD와 드라마를 공부하는 작가지망생이 작품을 썼다. 주인공은 베트남에서 시집온 새댁. 그녀는 나이 많은 신랑과 시어머니를 모시고 남쪽 바닷가에 산다. 한푼이라도 벌려고 관광해설사 공부를 하다가 어느날 시어머니 오해로 집에서 쫓겨난다. 새댁은 해질녘 동네 담 밑에 쭈그리고 앉아 베트남 말을 내뱉는다. '쿠옥숑 까오엠 크호옹 부온바 노이기앙.' 번역하니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라!'

강의시간에 작가의 기발한 차용에 크게 박수를 치니 함께 공부하는 동료들이 뜨악한 표정으로 처음 듣는 시라고 한다.

그날 구보씨는 큰 충격을 받았다.
명색이 작가가 되려는 자들이 이 시를 처음 듣다니. 내색하지 않고 김소월부터 한국의 대가들과 그들의 명시를 열거하는데 반응 무! 내친김에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 맥베스, 리어왕, 오셀로, 햄릿을 읽었느냐고 물었더니 침묵의 강이 흐른다. 요즘 시인과 소설가의 이름을 대라 하니 그때서야 이쪽저쪽에서 이런저런 이름이 터져나온다. 하긴 세상이 댓글에 포박당했는데 고전 읽을 시간이 있겠는가.

그날 밤 구보씨는 친구와 술을 마시며 큰 소리로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라'를 읊었다. 친구는 요즘 무슨 일 있느냐며 쳐다봤다. 강의시간에 벌어진 상황과 충격을 말하니 즉답을 날린다. "이발관이 없어져서 그래." 그 명답에 그날 충격이 훨훨 날아갔다. 어릴 적 구보는 이발관이 싫었다. 아버지는 돈도 안 주며 외상으로 머리를 깎고 오라고 했고, 구보는 동네아저씨들이 우글거리는 이발관 뒤쪽에 쭈그리고 앉아 차례를 기다렸다. 그때 늘 마주쳤던 두 편의 시.

시몬, 나무 잎새 져버린 숲으로 가자. 낙엽은 이끼와 돌과 오솔길을 덮고 있다. 시몬, 너는 좋으냐? 낙엽 밟는 소리가. ―구르몽

또 쌍둥이처럼 걸려 있던 시.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라. 슬픔의 날 참고 견디면 기쁨의 날 오고 말리니. 마음은 미래의 것. ―푸시킨

중학교에 가서 푸시킨이 러시아의 국민작가라는 걸 알았고, 사회생활을 하면서 그 명작의 위대함을 절감하며 이발소가 고마웠다.

1주일 후 강의시간에 구보씨는 제자들에게 '백투더퓨처'란 영화를 봤느냐고 물었다. 모두들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부터 구보씨는 일주일간 곱씹은 썰을 풀었다.

작가가 되려는 건 창작을 하려는 것. 창작이란 아직 누구도 만들어내지 않은 '미래'를 생산하는 일. 미래로 가려면 현재에만 매달리지 말고 제발 과거로 가라. 흔히 역사공부의 목적이 과거를 통해 현재와 미래의 길을 찾기 위함이라 하지 않느냐. 과거로 가서 거장들의 고전을 익히면 미래 창작의 길이 보인다.


옛것을 익혀 새것을 안다는 온고지신을 영어로 의역하면 Back To the Future다. 소설과 영화, 드라마만 그럴까. 세상 모든 분야가 마찬가지일 것이다.
현재와 함께 과거를 탐색해야 만리길을 내다보는 눈, 명견만리(明見萬里)가 생기리라. 구보씨는 강의를 끝내고 집으로 오며 중얼거렸다. "에잇 이발소가 필요해!"

이응진 경기대 한국드라마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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