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순민 칼럼]

혁신과 불법 사이

"K팝의 나라가 어쩌다가"
중·동남아 국가에도 추월
규제가 기업 가둬선 안돼

세계적 경제전문 매체인 블룸버그가 지난주 흥미로운 제목의 기사를 실었다. 제목은 'K팝의 나라는 어떻게 혁신에 실패했나', 필자는 아시아 담당 칼럼니스트 슐리 렌이다. 렌은 지난 9월 "한국 주식 투자자들은 부패한 억만장자보다 '강남 좌파'가 더 나쁘다고 말할 것"이라고 돌직구를 날렸던 바로 그 여성 칼럼니스트다. 그는 이번에도 "강력한 규제가 유니콘 기업을 가둬놓고 있다"며 한국 정부의 스타트업 정책을 강력 비판했다. 좀 길지만 칼럼의 첫머리를 인용해보자.

"한국은 폴더블폰, K팝 그리고 뷰티크림의 나라다. 그러나 어찌 된 일인지 가장 반짝이는 최첨단의 나라 한국이 세계적인 혁신 흐름에서는 뒤처져 있다. 주위를 둘러보라. 한국의 우버는 도대체 어디에 있는가. 모바일 결제부터 자산관리까지 아우르는 알리바바의 금융계열사 '앤트파이낸셜' 같은 기업이 한국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한국에서 태동한 소수의 유니콘 기업들조차도 걸음마 단계에 불과하다. 심지어 한국 자금이 몰려들고 있는 인도네시아가 한국보다 더 큰 규모의 스타트업을 배출하고 있지 않나."

블룸버그의 지적이 아니더라도 각종 규제로 혁신이 가로막힌 사례는 차고 넘친다. 최근 온·오프라인 연계(O2O) 플랫폼을 기반으로 온라인 환전서비스를 해오던 한 핀테크(금융기술) 스타트업이 사업을 접었다. 이들이 지난해 5월 시작한 온라인 환전서비스 '웨이즈'는 스마트폰 애플리케이션으로 예약하면 미국 달러화 등 10여종의 외화를 공항 등 이용자가 원하는 장소에서 수령할 수 있는 서비스다. 지점 운영비 등이 필요없기 때문에 환전수수료를 확 낮출 수 있다. 그러나 공항 입주 은행들의 강력한 반발에 이어 인천국제공항마저 제재를 강화하자 최근 서비스를 종료했다.

뚜껑을 눌러 캡슐을 터뜨리면 병 안에서 발효되는 맥주키트를 개발한 한 벤처기업도 된서리를 맞았다. 이 기업이 개발한 맥주키트는 내년 미국에서 열리는 세계가전박람회(CES 2020)에서 혁신상을 수상하기로 돼 있지만 제품에 대한 행정당국의 유권해석이 오락가락하면서 공장 문을 닫을 위기에 놓였다. 논란은 '주류는 알코올 1도 이상'이라는 주세법 규정에서 비롯됐다. 기재부 등 관련 당국이 이 제품을 술로 봐야 하는지, 물로 봐야 하는지를 놓고 갑론을박하는 사이 이 기업은 공장 해외이전을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다. 규제혁신과는 거리가 먼 소극행정이 빚은 촌극이다.

제자들과 함께 자율주행차 스타트업을 창업한 서승우 서울대 교수도 미국행을 선택했다. 서 교수는 지난 2014년 국내 최초로 도심형 자율주행차 '스누버'를 개발했지만 국내에서 사업이 여의치 않자 미국 실리콘밸리로 회사를 옮겼다. 서 교수는 한국과 미국을 오가는 수고를 감수하면서까지 해외로 회사를 옮긴 이유로 '산업 생태계'와 '사업 기회'를 꼽았다. 사업 기회를 포착하기엔 미국이 더 적합해서이기도 했지만 자율주행 규제에 가로막힌 한국에선 사업모델을 더 확장해 나갈 재간이 없었기 때문이란 설명이다.

지난 8월 급작스럽게 세상을 떠난 국내 1세대 벤처기업가 이민화 전 KAIST 교수는 한국이 '4차 산업혁명의 갈라파고스'가 돼가고 있는 현실을 늘 안타까워했다.
그는 "산업의 창조적 파괴를 포용하는 국가는 발전하고 그러지 못한 국가는 몰락한다"고 단언하면서 "새로운 시대를 리드하는 국가가 되기 위해선 새로운 시도를 용납하고 심지어는 시행착오를 귀하게 여기는 혁신정신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런 점에서 보면 강력한 규제가 여전히 막강한 힘을 발휘하고 있는 지금의 혁신 정책은 낙제점에 가깝다. '스타트업계의 BTS'가 하루속히 나올 수 있도록 이제는 혁신기업을 그만 놓아줘야 한다.

jsm64@fnnews.com 정순민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