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칼럼 기자수첩

[기자수첩] 김학의 무죄, 검찰 스스로 불신 키웠다

이진석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19.11.25 17:17

수정 2019.11.25 17:17

[기자수첩] 김학의 무죄, 검찰 스스로 불신 키웠다
"법은 권리 위에 잠자는 자를 보호하지 않는다."

독일의 법학자 루돌프 폰 예링은 자신의 권리가 침해당하는 상황에서도 행동하지 않는 개인들은 법의 보호를 받을 수 없다고 지적했다. 예링의 격언은 민법상 소멸시효를 설명할 때 주로 인용된다.

민법에 소멸시효가 있다면, 형법에는 공소시효가 있다. 두 제도는 일정 기간 권리를 행사하지 않는다면 그 상대방에게 더 이상 책임을 물을 수 없다는 공통점이 있다. 다만 민법상 권리를 행사할 수 있는 주체는 권리를 침해당한 개인이나 법인이지만, 형법에선 피해자가 아닌 '기소권'을 독점한 검사로 볼 수 있다.
전자가 권리를 제대로 행사하지 않는다면 그 손해는 당사자가 책임지면 될 일이지만, 후자의 경우 피해자와 선량한 시민들이 짊어져야 할 몫이 된다.

법원은 지난 22일 건설업자 윤중천씨 등으로부터 금품 등을 받은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김학의 전 법무부 차관에게 무죄 판결을 내렸다. 김 전 차관 측 변호인은 판결 직후 "법과 정의에 따라 판단해준 재판부에 경의를 표한다"며 재판부의 판단을 추켜세웠다. 그러나 판결문을 살펴보면 이번 판결은 '법과 정의'가 아닌 '법의 허점'을 명확히 보여주는 사례다.

1심은 김 전 차관이 윤씨로부터 '성접대 기회'를 제공받아온 점을 인정했다. 더 나아가 '별장 성접대' 동영상 속 인물은 김 전 차관이 맞다고 봤다. 그럼에도 공소시효가 지났다는 이유로 죄를 물을 수 없다고 판단했다. '죄는 있는데 처벌은 할 수 없다'는 역설적인 결과를 일반 시민에게 어떻게 납득시킬 수 있을까.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동영상이 나온 뒤 6년이 넘는 시간이 있었는데, 공소 제기가 늦었다는 판결은 분노를 넘어 허무함을 불러온다.

검찰은 이번 사건을 계기로 '검찰에 대한 불신은 스스로 키운다'는 비판을 피할 수 없게 됐다. 최근 서울지방변호사회 소속 변호사를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서 70% 넘는 응답자들은 '검찰개혁이 필요하다'는 의견을 밝혔다.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를 설치해야 한다는 응답도 절반을 넘었다. 시민뿐만 아니라 법조인들조차 검찰의 영향력을 축소해야 한다는 데 공감한 것은 의미심장하다.
검찰은 이제 권리 위에 잠들었던 책임을 져야 한다.

fnljs@fnnews.com 이진석 사회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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